한 고비를 넘겼네요. 


멋진 청첩장이라서 받는 분들의 반응이 폭발적이네요.


백문이 불여일견, 사진들 나갑니다.


[카드왕에서 보내온 사은품!! 여기에 뭘 넣지?]


[식권 쿠폰도 사은품!!!]


[여행을 떠나요!]


[티켓은 준비 되었나요?!]



[여권에 스탬프가 쾅!]


[고급 봉인의 느낌]

무엇이든 처음 시작하는 일이 순탄할 수만은 없지만, 본인의 경우도 독일 생활을 시작하면서 쉽지 않은 시간들을 보냈었다. 인터넷 회사와의 의사 소통 문제로 인해 촉발된 당시 사건은 결국 거의 반 년에 가까운 시간을 보내고 나서야 해결할 수 있었다.

관련 링크: 2009/04/16 - [My diary(log)] - 인터넷 문제 그리고...
 

덧붙임 #2

원래 여기에서 글을 맺고자 했으나, 문득 중요한 예외에 해당하는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벤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도, 벤처 기업 자체의 성공률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굴지의 성공한 벤처 기업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두 번째 기회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또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붙는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아무리 여러 번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다면, 꾸준히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즉,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며, 도덕적 결함은 두 번째 기회 제공의 예외라는 것이다.

예컨대, 말과 행동이 항상 정반대이며, 기업인으로서도, 공직자로서도 항상 도덕적 결함 투성이었던 전과 십수범을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힌 것은, 두 번째 기회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회가 고국 사회에도 널리 허용되었으면 하는 필자의 의도가, 오독(誤讀)으로 인해, 절대로 다시 기회가 주어져서는 안되는 이들에게까지 기회를 주는 빌미가 될까 염려되어 몇 자 더했다. 마침 시기적으로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할 사람들이 많을 때니까.
에센의 달이 다가와서 이런 저런 소식들을 챙겨보다가 After Essen Party라는 것을 발견했네요. 에센이 끝나고 이틀 뒤, 베를린에서 하는 파티라는군요.

http://www.boardgamenews.com/index.php/boardgamenews/comments/after_essen_game_party_in_berlin/

해당 홈페이지를 뒤적거리다가 또 꼬리에 꼬리를 무는 행사 소식, 바로 베를린 게임대회였습니다. 10월 3일~4일이더군요. 카탄의 개척자, 도미니언, 아니마 등의 토너먼트 대회가 있고, 카탄 토너먼트는 10월 2일 17시에 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이걸 해당 홈페이지에서 본 시각이 10월 2일 16시였습니다.


10월 3일은 독일도 통일 기념일로 휴일입니다. 베를린에서는 분단 독일과 통일의 상징과도 같은 브란덴부르크 문 앞에서 이런저런 행사들이 계획되어 있더군요. 하지만, 급격하게 추워진 날씨 탓에 상황 봐서 보드게임 모임이나 한번 다시 가볼까 생각중입니다.

그럼 모두들 행복한 추석이 되시길 바랍니다. (갑자기 뜬금없긴 하군요.)

아! 제 카탄 성적이요? 여기서 확인하시길...


대안이 없는 비판을 하지 말라?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철학 수업, 정확히는 리더십 수업 시간에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토론으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고, 학생 중 한 명이 발표를 하고, 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토론으로 발전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진원지는 필자 본인이었다.

본래부터 무엇이든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 습관인 필자. 이 날의 발표를 담당한 학생은 논리 전개가 상당히 엉성했고, 그걸 납득할 수 없었던 당시 필자는, 물음표를 붙이는 수준을 넘어서 상대의 발표내용을 거의 다 해체하는 수준까지 몰아갔다.

본래 10여분이 할애되었던 발표가 30분을 넘겼고, 초과된 그 시간은 필자의 논파로 인한 것이었으니, 분위기가 조금 험악해졌다. 급기야 자신의 논리가 모두 파해되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발표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귀관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안이 뭔가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전가의 보도가 칼집에서 나오는 것을 느끼며, 늘상 그렇듯이 “대안 없는 비판”에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예상했다.

사실 해당 발표 주제에 대해서 필자는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였다. 발표자가 주제선정부터 발표까지 모두 준비하는 과제였고, 단지 그 발표가 너무나 엉성했기에 본의 아닌 논파가 된 것이지, 대안 논리를 염두에 두고 논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소년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 “대안 없는 비판은 삼가라!”는 명제는, 위와 같은 필자의 행동을 무가치한, 아니 더 나아가 해악을 끼치는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 때 교수님이 나서셨다.

“흔히들 대안없는 비판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들을 가지기 쉽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며 백안시 당하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러한 역할을 맡기를 꺼려합니다. 하지만, 그건 옳지 못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있어야 좀 더 나은 논리를 갖추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맡는 사람이 좋은 말을 듣기는 어렵기 때문에 매우 용기있는 사람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필자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이 날의 교수님 말씀은, 필자 생전에 처음으로 “대안없는 비판”에 대해 칭찬을 들은 것이었다. 졸지에 예상치도 못한 칭찬을 듣게 된 필자는, 하지만 기쁘다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그동안 욕만 먹었던 행동이 오히려 칭찬 받을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누구라도 어리둥절했으리라.

시간이 지나, 이제 이국 땅에 몸 담고 살고 있는 지금. 이미 이 곳에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도 용인되고 존중받는다는 사실이 무척 새삼스럽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이 곳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깨달음이기 때문일까.

아직도 한국에서는 “그럼 네가 해봐! 네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어?”라는 식의 유치한 공격이 잘 먹힌다. 나름 식자들이 모여있다는 (또는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민국 국회나 행정부에서도 제법 이런 논리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무리들이 꽤 많은데, 불과 7시간 밖에 차이나지 않는 곳인데도 어쩌면 이렇게도 다른 세상에 사는지 모르겠다.
독일에 온지 이제 7개월 남짓 됩니다. 독일어를 사실상 이곳에 와서 처음 배우기 시작했기 때문에, 아직 독일어로 의사소통을 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때문에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며 버텨오고 있지만, 지금 이야기하게 될 사건은 정말이지 울화통이 터진다는 표현이 어떤 느낌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사건이더군요. 지난 11월에 시작되어 현재까지도 해결되지 않은 이 사건 때문에 저와 아내는 건강까지 악화되고 있을 정도니, 그 스트레스는 이루 다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인터넷 회사와의 계약에서 시작됩니다. 10월 1일, 독일에서의 본격적인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 바로 인터넷을 신청했습니다. 문제의 회사는 Freenet이고, 해당 회사에서 제공하는 서비스 가운데 가장 비싼 월 30유로짜리 상품을 신청했습니다. 최소 의무 계약 기간이 2년이더군요.

약 한 달여의 기다림 끝에 11월 1일부터 인터넷을 쓸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로부터 일주일 후에 갑자기 인터넷이 안되는 겁니다. 물론 같이 물려있는 전화도 포함해서 말이죠.
일시적인 것이려니 싶어서 며칠을 기다렸는데도 서비스는 여전히 불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전화를 걸었지요. 그런데 맙소사... 이 회사의 전화를 통한 고객 서비스는 상상을 초월하더군요. 전화 연결이 어려운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천신만고 끝에 전화 연결에 성공하더라도, 담당자가 독어 외에는 말을 못하는 겁니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습니다만, 당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이제 막 3개월 째였던 본인으로서는 더듬더듬 의사표현은 가능했을지 몰라도, 상대방이 “전화로” 말하는 걸 알아듣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기 때문에, 영어로 대화가 가능한 직원과 통화하기 위해 거의 나흘 가량을 전화기를 붙잡고 있어야 했습니다.

간신히 “의사소통”에 성공해서 직원으로부터 새로운 기기를 보내주겠다는 답변을 듣고 약 열흘간의 기다림(!) 끝에 새로운 기계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 기계도 안되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전화기를 붙잡고 인격수양의 시간을 가져보았지만,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기계를 회송하는 편에 편지를 써서 같이 부쳤습니다. “새로 보내준 기계도 작동이 안된다. 문제를 해결해주던지, 계약을 해지하던지 양자택일을 바란다.”는 내용의 영문 편지였지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록 아무런 답신도 없고, 오히려 월 사용금액 통지서만 날아오더군요. 그래서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12월 10일까지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길 바란다. 아니라면 계약이 해지된 것으로 알겠다. (당시 편지를 보낸 시점은 11월 말 경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답신은 오지 않길래, 제 거래은행에 가서 자동이체 지급정지 및 징수금액 회수를 요청했습니다. 이 회사가 그 때까지 제게서 징수해간 금액이 약 70 유로 남짓 됩니다.

그제서야 답신(?)이 오더군요. 답신이라고 하기도 묘한 편지 두 통이 날아왔습니다. 하나는 “귀하의 계약 철회 요청은 부적절한 사유이므로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귀하의 계약은 최소 2년 동안 유지됩니다.”라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제가 회수한 금액에 10유로를 더해서 입금하라는 내용의 통지서였습니다. 왜 부적절한 사유인지에 대한 내용은 전혀 없고, 다짜고짜 안된다는 말만 덩그러니 던져놓으니까 황당하기 그지 없더군요.

다시 편지를 썼습니다. 사건의 전후관계와 요구사항을 조목조목 짚어서 A4 8매 분량의 한/영 편지였지요. 그러나, 여전히 회사측은 묵묵부답입니다. 몇 주 뒤에 편지 한 통이 날아와는데, 앞 선 금액에 또 10유로를 가산하여 입금하라는 내용의 통지서였습니다. 그러니까 90 유로 남짓한 금액이 되었지요.

전화로도 해결이 안되고, 편지로도 해결이 안되는 미칠 듯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아는 분께 부탁해서 독문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러자 회사에서 답신이 왔는데, 편지를 보낸 사람이 계약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를 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 분께 위임장까지 써주었지만, 회사로부터 별 다른 대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베를린 리포트의 배너 광고에 있는 한국 변호사님께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독일에서도 소송으로 가게 되면 패소한 쪽이 승소한 쪽의 소송비용까지 부담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약간의 희망을 안고 시도해본 것이었는데, 돌아온 답변은 절망적이었습니다. 상담료만으로 180유로를 요구하는 변호사의 답변은 제 말문을 막아버리더군요.

불안한 나머지 최후의 수단이라는 생각으로 한국 대사관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그 악명 대로 대사관에서도 나 몰라라하더군요.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는 저에게 한국 대사관이 해준 조치는 다른 변호사의 명함 한 장이었습니다.

그래도 익사 직전의 제겐 지푸라기 같은 것이었기에 명함 한 장 들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갑니다. 그 때가 벌서 해를 넘기고도 2월이 된 시점이었습니다.

변호사는 한국인이었지만, 독일에서 태어나서 자란 관계로, 저와의 의사소통은 영어로 진행되었습니다. 저는 해당 회사와 주고받은 모든 문서자료와 사건일지를 가지고 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제 설명을 들은 변호사는, “회사에 한 푼도 돈을 지불할 필요가 없다. 회사에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신도 돈을 지불할 의무가 없다.”며 저를 안심시켰고, 문제 해결을 위해 회사에 연락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비록 선임비용이 50유로 가량 들 것이라고 했지만, 그동안 골머리를 썩게 했던 문제가 해결된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건 끝이 아니라 또다른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제가 변호사를 선임하고 나서 며칠 후, 회사측이 고용한 변호사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말이 편지지 청구서입니다. 이제 청구 금액도 190유로 정도로 급상승했더군요. 이 편지를 변호사 사무실에 맡기고 왔습니다. 제 변호사는 이 때도 저를 안심시키더군요. 자기가 알아서 하겠노라고...

그로부터 약 한 달이 지난 3월 17일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와서 사무실로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제 변호사는 약속시각이었던 9시를 펑크내고, 저로 하여금 2시간을 그 주변에서 서성이게 만들더니, 충격적인 메시지를 제게 전달(!)합니다. 제가 회사에 100유로를 지불해야 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유인 즉, 제가 회사에 두 번째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문제에 대해서 제게도 책임이 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제게 청구한 전체 금액의 반인 100유로를 제가 지불하면 기계를 보내주겠다는 내용이더군요.

이게 무슨 해괴한 말입니까? 그들이 제게 청구한 금액은, 제가 사용하지도 않은 지난 해 11월부터 3월까지의 인터넷 요금과 그들의 변호사 비용입니다. 이 금액 자체도 제가 부담해야 할 아무런 당위성도 찾지 못합니다. 게다가 제가 수차례에 걸친 전화와 편지를 통해 많은 기회를 제공했다는 걸 상기하면, 그들의 논거와 결론 모두 부당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걸 전달하는 변호사의 말이었습니다.

한 달 전의 첫 만남에서 본인이 했던 말을 뒤집은 것은 물론이고, 저에게 고용되었기 때문에 제 입장을 그들에게 대변해야 하는 변호사가, 상대 변호사의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전달자의 역할만 하고 있으니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렇게 속이 터지는 이야기를 듣고도 제가 어쩔 수 없었던 것은, 이어진 변호사의 말이었습니다.

“만일 소송까지 가게 되면 변호사 비용만 7~800 유로에 달할 것이다. 이런 소액 사건을 가지고 이런저런 서류 검토하는 것도 귀찮은 일 아니겠는가. 그냥 그들의 요구조건을 들어주고 사건을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치솟은 환율 때문에 1유로도 아까워서 벌벌 떨며 사는 저희 부부에게 7~800 유로 운운한 것은 결정타였지요. 속에서는 열불이 났지만, 그냥 그렇게라도 해결해 달라고, 대신 향후에 이런 문제가 다시는 발생하지 않게만 해달라는 조건을 붙여달라고 했습니다. 제 변호사는 상대측에게 그 내용으로 연락을 하고, 답신이 오게 될 다음 주에 제게 연락을 주겠다고 했습니다.

다음 주, 그 다음 주가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변호사로부터 아무런 연락이 없더군요. 사무실로 전화를 몇 차례 걸었는데, 그 때 마다 자리에 없길래, 전화 달라는 메시지를 남겼지만 역시 감감 무소식입니다. 이 메일을 보내도 마찬가지로 답신이 없더군요.

4월 3일,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를 걸었던 저는 또 충격적인 말을 들어야만 했습니다. 제 변호사가 휴가를 갔고, 5월 중순에야 돌아온다는 비서의 말.

극심한 스트레스에 난생 처음 저혈압 판정을 받은 저는, 그 순간 온 몸의 피가 쫙 빠져 나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입니까....

그 주말동안 잠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독일 생활을 접고 귀국하자고, 이 저주받은 곳에 더 머무를 수가 없겠다며, 아내랑 부둥켜 안고 펑펑 울면서 그렇게 주말을 보냈습니다.

이제 체념하는 마음으로 모든 걸 포기하고 귀국하기 위해 이런 저런 정리를 하면서, 변호사에게 다시 이메일을 보냈습니다. 중대 결심을 하게 될 것 같으니, 조속히 연락을 주기 바란다는 내용으로 말이죠.

그런데 좀 전에 전화 한 통을 받았습니다. 제 변호사랑 같이 일하는 독일인 변호사인 모양입니다. 약 5분 여동안 전화로 주고받은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인터넷 회사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4월 말까지 130유로를 내면 기계를 보내주겠다고 한다. 윤 변호사(제가 고용한 한국인 변호사) 말로는 그들의 요구조건을 받아들이는 편이 좋겠다고 한다. 윤 변호사는 아직 휴가에서 돌아오지 않았기에 내가 대신해서 당신에게 연락하는 것이다.”

또 30유로가 올랐더군요. 이 쪽 변호사의 무능함을 상대측에서도 눈치를 챈 모양입니다. 지난 번의 100유로도 말도 안되는 조건을 수락하는 것이었는데, 그새 30유로가 올랐다니...

일단 다음 월요일에 대리 변호사와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습니다.

과연 저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소연할 곳조차 없어서 홧병이 생길 지경입니다. 아무 연고도 없이 아내와 단둘이서 시작한 독일 생활이 기로에 섰습니다. 이렇게 독일 생활을 청산하기엔 그간의 결심과 노력이 너무나 아깝지만, 현 상태는 정말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기분입니다. 제가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요? 현명한 분들의 고견이 제게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독일에 첫 발을 디딘 것이 지난 해 8월 26일이니까, 벌써 반년이라는 시간을 이곳에서 보낸 셈이다. 반 년이면 아무리 낯선 땅이라도 어느 정도 적응이 다 되었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아직도 나에겐 어렵고 힘든 곳으로 느껴진다.

가장 나를 괴롭히고 있는 문제는 인터넷 회사. 일전 포스팅을 통해서도 밝힌 바 있지만, 회사의 이해할 수 없는 고압적 자세로 인해 나와는 아무런 소통이 안되었고, 회사 측은 변호사를 통해 나에 대한 최후 통첩을 해온 상태. 나 역시 최후 통첩이 있기 바로 며칠 전에 변호사를 고용하여 대응을 하기로 했다. 아직도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서 느낀 이곳의 사람과 사회에 대한 이질감이 나를 몹시도 지치고 힘들게 만들었다.

무엇보다 아무도 도와주는 이가 없다는 점이 너무 고달프다. 한국에서도 그다지 남의 도움에 크게 의존하며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말이 통하지 않는 이곳에서 온전히 혼자 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내게 꽤 큰 시련이 되고 있다.

Rostock에 거주하는 친구로부터 소개받은 사람은, 전화 연락조차 힘들 정도로 거의 믿을 수 없는 사람이고, 그 이전에 이곳 정착을 도와준 사람은 정신 이상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히스테릭한 사람이라 도움은 커녕, 나와 아내를 더욱 두렵게 했다. 몇몇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해본 결과, 그들의 도움은 없으니만 못한 경우가 더욱 많았기에 앞으로도 그러한 도움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가 없다.

심신이 모두 지쳐버려린 탓인지 몸 여기저기가 아프다. 가끔씩 복통과 더불어 불면증과 두통, 그리고 수시로 찾아오는 무기력함 때문에 병원을 찾았다. 저혈압이란다. 120-80이 정상인데, 80-60이란다. 늘 우중충하게 구름이 잔뜩 끼어있는 베를린의 겨울 날씨와 스트레스가 만들어낸 합작품 같다.

생활도 힘들지만, 말 배우기도 만만치 않다. 지난 1월까지 총 3단계 어학과정 가운데 1단계를 마쳤고, 2월부터 2단계 과정에 들어갔는데, 1단계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갑자기 난이도가 높아졌다. 매일 50여개의 새로운 단어들이 쏟아져 나왔고, 독해와 청취 모두 엄청난 수준으로 상향조정되었는데, 정작 선생들은 오히려 이 정도의 난이도가 당연하다는 듯 간단한 설명만으로 단원을 넘어가곤 한다. 어릴 적부터 따로 예/복습을 하기보다는 수업시간을 100% 활용하는 걸 선택했던 나로서는, 소화하기 힘든 수업이 또 스트레스가 되었다. 수업이나 식사시간 그리고 수면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을 독일어 학습에 쏟아붓고 있지만, 그마저도 역부족이다. 한국을 떠나 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온지라, 이제 재충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지난 8월 26일에 이곳에 도착했으니까, 독일 생활도 벌써 두 달 반이 되었습니다. 아직도 말이 서툴고 모든 것이 낯설지만, 그럭저럭 계획했던 것들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네요. 근황도 전할 겸, 정리도 할 겸 포스팅을 합니다.

1. 비자 신청 등
독일을 비롯한 대부분의 EU국가들을 한국인이라면 무비자로 90일동안 머무를 수 있습니다. 관광이 목적이라면 90일을 초과해서 머무르지 않을테니, 사실 상 관광목적인 경우에만 무비자를 허용한 것이지요. 그래도, 덕분에 예전 같았으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현지 비자 신청이 가능해졌고, 그것이 이곳에서는 더 일반적이더군요. 도착해서부터 준비했던 것이고, 비자가 발급되지 않으면 독일 생활이 불가능하므로 제게 가장 최우선 과제였습니다. 그런데, 제 인생이 항상 그랬던 것처럼, 순조롭게만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더군요.

우선, 재정보증서류에서 암초를 만났습니다. 비자신청인이 아무리 재산이 많아도 규칙적으로 일정 금액이 입금되었다는 것을 입증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게 아니라면, 현지 계좌에 거액을 예치해두어야 하고, 일정 기간동안은 상당부분 인출할 수 없도록 묶어두어야만 합니다. 환율이 역대 최악을 기록하는 최근 상황(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을 당시에는 아직 유로화가 정식 출범하지 않았으므로, 유로화의 환율은 현재가 최악임)을 감안하면 현실적으로 후자는 불가능합니다. 마찬가지 이유로 부모님 역시 월급생활자가 아니므로 부적격.

결국 사업하시는 외삼촌이 나서서 재정보증서류를 발급받았습니다. 이 과정이 거의 한 달이 걸렸네요. 만일 도착 직후부터 준비하지 않았다면 매우 곤란했을 겁니다.

해당 서류는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iMac과 함께 제게 도착을 했고, 이를 들고 한국 대사관을 찾아갔습니다.

첫날 찾아갔을 때는 영사부 근무시간이 막 지났을 때더군요. (세상에! 오후 4시에 업무 종료라니...) 그래도 다행히 친절하신 직원분 덕분에 필요서류가 무엇인지는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쉬운 건 아무것도 없다니까요.

호주제가 유명무실해진 건 알고 있었지만, 호적 자체가 사라진 건 몰랐습니다. 호적이 가족관계 증명서를 비롯한 여러가지 증명서로 분할(!)되었으며, 이들 모두 전자정부를 통해 프린터 출력이 불가능한 서류입니다. 또한 본인이 아니면 신청도 불가! 결국 전자정부를 통해 제가 직접 신청을 하고, 이를 우편 송달하게 했습니다. 이 서류를, 한국에 있는 본가 컴퓨터의 원격제어를 통해 스캔을 받았고, 아직 프린터가 없기 때문에, USB메모리에 이를 담아서 대사관으로 향했습니다.

대사관에서 원래는 안해주는 건데, 약간의 아양(!)을 겯들여서 서류출력을 허가받았습니다. 그리하여, 독일어로 된 기본증명서, 가족관계증명서(혼인증명서), 운전면허증 공증본을 손에 넣었습니다.

드디어 필요한 모든 서류를 손에 넣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의 과정도 꽤 우여곡절이었습니다만, 이후의 과정도 역시나(!)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행정관청 민원부서에서 전입신고를, 외국인관청 비자부서에서 비자발급을 요청해야 하는데, 문제는 이들 관청의 공무원들이 현재 파업중이라는 겁니다.

사실 전입신고는 10월부터 하려고 했었던 것인데, 매번 파업으로 인해 번호표 받는데 실패해서 11월까지 미뤄진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전입신고를 하지 않으면 비자 신청도 안된다는 것이죠. 오전 8시부터 업무를 하는데, 7시에 관청을 찾아갔습니다. 이미 긴 줄이 늘어서 있더군요. 제가 현재 거주중인 Wedding은 Berlin중에서도 외국인이 많이 살기 때문에 항상 붐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업무 시작하기도 전에 이렇게 긴 줄이 늘어서 있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더 나쁜 것은 제 앞에 4명을 남겨둔 시점에서 번호표 분배를 종료했다는 것이지요. 역시 파업 때문에 정상업무가 안되기 때문입니다.

벌써 수차례 미역국을 먹었던 저로서는,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서 베를린에 있는 모든 관공서 주소를 받아서 검색을 했습니다. 여담입니다만, 구글 맵스가 없었더라면 여기서 어떻게 살았을지 모릅니다. 한국은 주소 체계가 상당히 어지러워서 구글에서도 제대로 된 지도를 등록하지 않은 걸로 아는데, 이곳 독일은, 심지어 제가 가지고 있는 아이팟터치에서조차도 주소만 입력하면 자세한 경로와 주변 지형을 알려줍니다. 이번에도 구글맵스의 힘을 빌어 다른 관청의 위치를 검색했습니다.

지난번 시내 중심에 있는 Tiergarten 관청에 갔을 때 깨달은 것이지만, 너무 중심부에 있는 관청을 가면 사람들이 많아서 어려울 것 같고, 그래서 후미진 곳에 분청을 목표로 했습니다. Wedding의 북쪽에 있는 구역이 Reinickendorf인데, 이곳의 중앙관청도 아닌 동분청을 찾아갔습니다. 지하철 역으로부터도 꽤 떨어진 곳에 있더군요. 다행히 제 예상이 맞아서 이곳에서는 번호표를 뽑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후미진 곳이라 점심을 사먹을 곳도 마땅히 찾을 수 없어서, 우리 앞에 대기중인 30여명을 믿고, 다시 도시 중심부로 나왔습니다. 참고로 Reinickendorf는 예전 Berlin에 포함되지 않았던 곳입니다. Berlin이 확장되면서 한 구역으로 편입된 것이지요.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결국 전입신고에 성공(!)했습니다. 그날 일과는 그걸로 끝이었지요. 수업도 들어갈 수 없었고... 아마 한국에서 전입신고에 하루를 온통 들어 바쳐야만 했다고 한다면 믿을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이건 외국인 관청에서의 다음날에 비하면 약과였습니다. 전날 하도 데였던 아내가 아예 새벽부터 가서 기다리자며 오전 5시에 기상을 시키더군요. 전날 외국인 관청에 가는 길을 익히는 등 이것저것 조사하느라 새벽 3시가 넘어서 잠자리에 들었던 저로서는 몸을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죽을 맛이었습니다.

Berlin 특유의 음울하고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외국인 관청에 도착한 건 새벽 6시를 갓 넘긴 시각. 하지만, 역시나 파업의 영향인지, 긴 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업무시작도 안 한 시각이라 그 쌀쌀한 새벽 바람을 맞으며 밖에서 대기하는 건 정말 고역이더군요. 아내는 인터뷰를 대비해 옷차림도 가볍게 하고 나와서 와들와들 떨고 있었고, 의도하지 않았던 노상포옹을 한 시간 가량 하고 있었어야 했습니다. 한국과는 다른 분위기의 독일이라지만, 아직까지 그때만큼 장시간 사람들 앞에서 서로 부둥켜 안고 있어본 적이 없었습니다. 추위 앞에선 별 수 없더군요.

약 한 시간 반 가량의 기다림 끝에 겨우 건물 내 진입에 성공했고, 대기표를 받았습니다만, 지루한 기다림의 시간을 여전히 남아있었습니다. 1차 대기 후 서류 작성을 했고, 다시 2차 대기 후 수수료 입금(60유로 x2), 그리고 3차 대기 후 결국 비자를 손에 넣었습니다만, 역시 이로 인해 그날의 일과를 모두 날렸습니다. 새벽 6시부터의 기다림은 무려 오후 1시가 넘어서야 결과로 나타났으니까요.

그나마, 저희는 양호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기다리고도 조금 늦게 도착했다는 이유만으로 약속(Termin)만 잡고 돌아선 사람도 있고, 심지어 그보다 늦게 온 사람은 아예 빈 손으로 돌아가기도 했으니까요.

한국에서의 관공서 업무가 아무리 비능률, 비효율이라지만 적어도 기다림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독일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2. 인터넷

이사하고 바로 한 것이 바로 인터넷 신청입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길어야 1주일 걸리는 인터넷 신청이, 무려 한 달이나 걸린 것도 문제지만, 약 1주일 정상 작동하더니 먹통이 되어버린 인터넷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전화와 함께 물려있는 인터넷이기 때문에, 전화도 먹통이 되더군요. 휴대전화로라도 고장신고를 하려고 했지만, 잘 알아듣기도 힘든 ARS 안내를 10초간 들은 대가로 2유로 가량이 빠져나가는 걸 보고 다시 전화를 걸 엄두가 안 나더군요.

그래서 인터넷 신청을 했던 동네 백화점 전자코너(dug)를 찾아갔습니다. 역시 아침 이른 시각에 찾아가서 점원보다 제가 먼저 도착했습니다. 하지만 이 점원, 지난 번 찾아갔을 때의 불친절함을 그대로 재현합니다. 저더러 직접 전화하라는군요. 짧은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가며 자초지종을 설명했건만 요지부동입니다. 한참을 졸랐더니 전화 번호 하나 딸랑 적어주면서 집에 가서 전화해보랍니다. 그리고 그 번호는 수신자 요금부담이니 휴대전화로 해도 된다는 이야기를 친절하게(!!) 해주더군요. 하지만, 지난번에도 그렇게 적어준 전화번호가 없는 번호로 밝혀진 바, 곧바로 현장 확인을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없었던 휴대전화가 선불 충전 전화로나마 있었던 게 다행이었지요. 역시 해당 번호는 ARS안내만 나오고 곧바로 끊어졌습니다.

상황이 이쯤 되자 오기가 치솟더군요. 의자에 앉아서 응대하는 점원과 아픈 다리를 부여잡고 일어서서 끝까지 버티는 고객. 아내는 거의 주저 앉아서 한숨만 내쉬고 있지만, 어떻게는 해결해야 한다는 의지 덕분에, 고맙게도(!!) 회사의 전화기로 제가 직접(!!) 전화를 걸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독일에서 영어는 그다지 보편적인 언어가 아닙니다. 한국은 때때로 ARS에서 영어 안내를 들을 수도 있지만, 독일에서 그런 건 없습니다. 오로지 독일어로만 모든 것이 진행됩니다. 심지어 E-Mail까지도...

여하튼 그곳에서 2시간 씨름한 덕분에 문제가 해결... 된 것이 아니고 고장 접수만 했습니다. 연락 주겠다는 말만 들을 수 있었지요.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전혀 연락을 들을 수 없었고, 결국 다시 휴대전화를 집어들었습니다. 아마 도합해서 3~4시간은 기다렸을 겁니다. 한 10여분 대기하다보면 나중에 다시 걸어달라는 말과 함께 끊어버리는 매정한 ARS만 상대한 시간을 모두 합치면 말입니다. 정말 소싯적 8비트 컴퓨터 게임하던 시절의 근성을 다시 끄집어 내는 곳이네요.

어쨌거나, 이렇게 근성으로 도전과 재도전을 거듭한 결과, 지난 금요일 담당자와의 통화연결에 성공했습니다. 흘흘... 그런데 담당자의 영어는 제 독일어에 필적할만하더군요. 그래도 그 친구의 영어 듣기 능력이, 제 독일어 듣기 능력보다 나을 것 같아서 계속 영어로 대화했습니다. 사실 대화를 할 때 말을 못하면 주도권은 상실할 수 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아무래도 기기 문제인 것 같은데, 혹시 주변에 인터넷 쓰는 친구가 있으면 기기 들고 가서 한번 테스트 해볼래?"라는 황당한 대답을 듣고, 그 때까지의 제 근성은 모두 분노로 환원되었습니다. 제가 영어로 분노를 표출하는 법에 익숙하지 않았다는 것이 그 친구에겐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제 노호성에 살짝 움츠려든 그 친구는, 기기를 새로 보내주겠다고 했고, 인터넷 불통기간에 해당하는 금액을 환불하는 조치까지도 취하겠다고 했습니다.

어쨌거나, 화요일인 지금까지도 기기는 도착하지 않았고, 내일까지도 소식이 없으면 저는 다시 근성을 발동시킬 겁니다. 정말 피곤합니다.

3. 프린터 그리고 건강보험

건강보험을 들었습니다. 11월 1일부터 적용되지요. 서류들은 진작에 도착을 했고, 병원 방문 시 제출해야 하는 서류도 있길래 챙겼습니다. 지난 달 말부터 약간의 복통이 있었고, 어제는 치통도 오더군요. 외국생활에서의 스트레스가 드디어 몸에 무리를 주기 시작한 모양입니다. 문제는, 병원에 가서 해당 서류를 제출할 뿐, 돌려받지는 못한다는군요. 다른 병원에 가려면, 이를 복사해서 써야 한다네요.

복사할 곳도 마땅히 안 보이고, 마침 프린터도 필요한데, 프린터를 하나 사와서 복사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은 건 약 2 주 전이었습니다. Saturn과 Media Markt 등을 수차례 오가며 시장조사를 했고, E-bay와 독일 가격비교 사이트까지 뒤적거렸지요. 맥 지원과 컬러 인쇄, 유지비 등을 고려하여 삼성 컬러레이저복합기 CLX-2160으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거 가격이 고무줄이더군요. 어느 곳에서는 300유로를 넘게 부르기도 하고, 인터넷 가격비교 최저가는 189유로니까, 계속 망설이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A/S문제도 있고 해서, 동네 컴퓨터 가게로 갔지요. 189유로에 판매하는 곳은 프랑스였습니다. 쿨럭~

미리 사전조사한 가격과 일치하는 219유로였는데, 문제는 배송료더군요. 온라인으로 구매하면 6유로 정도의 배송료가 붙고, 현장에서 구매해서 배송요청을 하면 16유로가 붙습니다. 결국 돌돌이를 끌고 가서 이걸 직접 끌고오는 무모한(!) 짓을 시도했습니다.

항상 그렇지만 순탄한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버스 시간이 안 맞아서 지하철 2정류장 되는 거리를 그 무거운 프린터를 끌며 걸어왔습니다. 오늘처럼 비바람이 불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일까요. 어쨌거나, 어제 모든 설치와 복사를 마쳤고, 이제 병원에 가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어째, 치통도 가라앉고 복통도 거의 없어진 것 같네요... -_-;;;

4. 월반

기초부터 계속 들어온 독일어과정인데, 석달째에 접어들면서 드디어 월반시험을 쳤습니다. 차근차근 듣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인데, 문제는 교실에 너무 학생수가 많다는 겁니다. 거의 15~20여명이 매일 수업을 함께 하는데, 선생님은 한 명의 낙오자도 허용하지 않으려는 타입인지라, 저와 아내의 입장에서는 참 답답했었거든요. 그래서 월반을 했고, 지금의 클래스로 옮겼습니다. 화법조동사와 간접화법 등을 건너뛰었기 때문에 혼자 복습하며 따라잡아야 하는데, 이런저런 신경쓸 일들이 많아서 아직 못하고 있네요. 아내는 벌써 거의 다 따라잡은 모양입니다.

5. 아이폰

T-mobile에서만 쓸 수 있던 iPhone이 O2와 Base에서도 가능해진 모양입니다. 오늘 알아본 바에 의하면 정식 대리점이 아닌 이베이에서만 가능한 모양인데, 어쨌거나 잘만 하면 iPhone을 손에 넣을 것 같습니다. 아직은 좀 더 알아봐야겠지만, 현재 사전으로서의 용도가 가장 큰 아이팟이 딱 1대 뿐인지라, 둘이 공부할 때 좀 불편한 점이 있어서 조만간 지르게 될 것 같네요.

그냥 최근 근황을 주절거리다보니 너무 길어졌네요. 종종 글은 쓰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못 올리다가, 이렇게 필 받았을 때 좌악 올려봅니다.
한국에서의 골치 아픈 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서, 한국을 떠났는데 환전할 때마다 한국의 불안한 정세를 피부로 느끼게 된다.

집 계약금(보증금) 납입을 위해 500유로를 인출했더니 한화로 무려 852,600원이 빠져나갔다. 1유로당 환율이 무려 1705.2원인 셈이다. 불과 얼마전 1570원대에 인출해던 기억이 있는데, 그 며칠 새 무려 130원 이상 오른 것이다.

누가 말했듯이 국가의 경제 기조가 매우 심약하다는 증거인가. 따지고 들면 복합적인 이유들이 다양하게 얽혀있겠지만, 집권초기부터 고환율 정책을 공공연하게 내세웠던 누군가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심한 역겨움을 느낀다.

내 경우는 몇 만원의 환차손에 불과하겠지만, 수출입을 하고 있는 기업들은 지금 어떤 표정일까... 그곳에 남아있는 이들에게 잠시 위로의 마음을 가져본다.

p.s. 얼마전에 500유로 인출했을 때는 78~9만원 가량이 빠져나갔는데... 쿨럭~
수업 마치고 막간을 이용해서 태중이와 승섭 형, 그리고 같은 수업을 듣는 한인 학생 한 명과 함께 베를린 구경을 다녀왔다. 과거 개선문과 같은 용도로 사용했던 곳인데, 분단 이후 그 앞으로 베를린 장벽이 지나감으로서 냉전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는 문화재.

다른 건 둘 째 치고 문화재 관리가 참 잘 되어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역시 조국과 비교해서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불안땐 부엌문 from Sangbae Ko on Vime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