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안이 없는 비판을 하지 말라?

10년도 더 전의 일이다. 철학 수업, 정확히는 리더십 수업 시간에 토론이 진행되고 있었다. 사실 토론으로 계획된 것은 아니었고, 학생 중 한 명이 발표를 하고, 이에 대한 질문과 답변이 이어지던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토론으로 발전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 진원지는 필자 본인이었다.

본래부터 무엇이든 물음표를 붙이는 것이 습관인 필자. 이 날의 발표를 담당한 학생은 논리 전개가 상당히 엉성했고, 그걸 납득할 수 없었던 당시 필자는, 물음표를 붙이는 수준을 넘어서 상대의 발표내용을 거의 다 해체하는 수준까지 몰아갔다.

본래 10여분이 할애되었던 발표가 30분을 넘겼고, 초과된 그 시간은 필자의 논파로 인한 것이었으니, 분위기가 조금 험악해졌다. 급기야 자신의 논리가 모두 파해되어 얼굴이 벌겋게 상기된 발표자가 이렇게 말했다.

“그럼 귀관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대안이 뭔가요?”

그 말을 들은 나는 멈칫할 수 밖에 없었다. 전가의 보도가 칼집에서 나오는 것을 느끼며, 늘상 그렇듯이 “대안 없는 비판”에의 비난이 쏟아질 것을 예상했다.

사실 해당 발표 주제에 대해서 필자는 사전지식이 없는 상태였다. 발표자가 주제선정부터 발표까지 모두 준비하는 과제였고, 단지 그 발표가 너무나 엉성했기에 본의 아닌 논파가 된 것이지, 대안 논리를 염두에 두고 논파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유소년 시절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 “대안 없는 비판은 삼가라!”는 명제는, 위와 같은 필자의 행동을 무가치한, 아니 더 나아가 해악을 끼치는 행동으로 규정하는 것이었다.

이 때 교수님이 나서셨다.

“흔히들 대안없는 비판에 대해서 부정적인 시각들을 가지기 쉽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라며 백안시 당하며, 때문에 많은 이들이 이러한 역할을 맡기를 꺼려합니다. 하지만, 그건 옳지 못합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가 있어야 좀 더 나은 논리를 갖추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합리적인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합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맡는 사람이 좋은 말을 듣기는 어렵기 때문에 매우 용기있는 사람만이 이런 역할을 맡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잠시 필자의 행동에 대한 칭찬이 이어졌다.

이 날의 교수님 말씀은, 필자 생전에 처음으로 “대안없는 비판”에 대해 칭찬을 들은 것이었다. 졸지에 예상치도 못한 칭찬을 듣게 된 필자는, 하지만 기쁘다기보다는 어리둥절했다. 그동안 욕만 먹었던 행동이 오히려 칭찬 받을 행동이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누구라도 어리둥절했으리라.

시간이 지나, 이제 이국 땅에 몸 담고 살고 있는 지금. 이미 이 곳에서는 반대를 위한 반대도 용인되고 존중받는다는 사실이 무척 새삼스럽다. 교수님의 가르침이 이 곳에서는 이미 일반화된 깨달음이기 때문일까.

아직도 한국에서는 “그럼 네가 해봐! 네가 하면 더 잘할 수 있어?”라는 식의 유치한 공격이 잘 먹힌다. 나름 식자들이 모여있다는 (또는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민국 국회나 행정부에서도 제법 이런 논리로 자신의 의사를 관철시키는 무리들이 꽤 많은데, 불과 7시간 밖에 차이나지 않는 곳인데도 어쩌면 이렇게도 다른 세상에 사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