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도착한 첫날부터 사고가 터졌다. 본래 여행이라는 것이 예기치 않은 요소들의 연속이고, 또 그것이 여행이 주는 즐거움이기도 하겠거니와, 본인에게 있어서 이제 PC는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필수 기기이며, 이번 여행에서도 디지털 사진들의 백업과 각종 정보 수집 등 매우 중요한 역할을 기대해야 하는 것인데, 이 기기의 액정이 깨어져버린 것이다. 흘흘~

약 1/4만 정상 작동하고 있는 액정을 통해 LA에 있는 애플스토어의 위치와 전화번호를 알아내었고, 서투른 영어로 수리 예약을 걸었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찾아가서 상담을 받은 결과... 무려 800달러라는 수리비가 든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마저도 텍사스에 있는 공장으로 보내야 하기 때문에 약 1주일이 소요된다는 말까지 겯들여져서 그야말로 본인을 패닉상태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miniDVI-Video 포트와 3.5파이-스테레오 콤포지트로 변환해주는 잭을 구매해서 모텔에 있는 TV에 연결하는 것으로 간신히 PC의 생명을 연장시키고 있다. 간혹 전혀 input인식이 안되는 TV들을 만나 고생하기는 해도, 아직까지 사진들 백업과 정보 수집을 할 수 있으니 불행중 다행이랄까...

집떠나면 고생이라지만, 그래도 그 와중에서도 소싯적에 많이 들어왔던 위기관리 능력이 아직 조금은 남아있다는 것을 발견하면서 놀라고 있다. 물론 이전과는 달리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 때문이겠지만...
막상 떠나려고 하니, 일들이 많이 생기나 보다.

본래 만나기로 했던 친구는 독일에서 귀국 후 연락이 없고, 갑작스럽게 개인적 일들이 생긴 친구 둘이 한국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나를 찾아왔다.

우여곡절 끝에, 본인의 인생에서 두 번째로 미국을 찾아간다. 어느덧 강산이 거의 한번 바뀔 즈음이니 그곳도 변해있겠지. 그리고 잃어버린 넓은 가슴을 찾고, 다시금 세상을 향해 웃을 수 있는 여유를 가지고 돌아왔으면 좋겠다.

이제 출발이다.
여러가지 고민거리가 많아서 심란하네요. 신경써야 할 일이 많다보니, 시간이 어떻게 가는 지도 모르게 총알같이 지나갑니다.

덕분에 또 이곳은 잡초가 무성한 곳이 되어버리는군요. 에휴~ 매일 일기 쓰겠다고 했던 결심은 결국 2달을 못 채우고 흔들려버렸습니다.

30년 이상 몸 담고 있던 곳을 포기하고 떠난다는 것이 참 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게다가 이 곳이 망조가 뚜렷하게 보인다는 점은, 저로 하여금 도망자의 심정으로 만드는군요.

그냥 착잡한 마음에 잠 못이루는 주말 저녁... 몇 글자 적어봅니다.

p.s. 16일에 출국합니다. 뭐 얼마 뒤 다시 돌아옵니다만, 그 땐 떠나는 것에 좀 익숙해지려나요...
곧 해외로 나가게 될 것을 대비하여, 전화기를 장만했다. 그리고, 함께 패키지 상품으로 나온 공유기도 장만했다. 평소 집에서 사용하는 100Mbps의 속도를 지원하는 무선 공유기가 없어서 계속 망설였는데, 802.11n 공유기 가격도 많이 떨어진데다, wi-fi 전화기 2대와 함께 구매하니까 매우 저렴하길래 과감하게 질러줬다.

처음엔 802.11g짜리 무선 랜카드를 AP로 변환하여 만든 무선 네트워크를 통해서 통화를 시도해봤더니 아주 약간의 잡음이 들렸는데, 공유기로 교체하고 나니, 일반 전화 만큼이나 깨끗했다. 뿐만 아니라, 아파트 밖에서도 전파가 잡히는 것이 꽤 만족스러운 세트이다.

스카이프 가입자끼리는 무료전화이므로, 해외에 나가서도 전화요금 걱정없이 전화할 수 있을 것 같다.

아울러, 일전에 cube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mp3p의 수리를 맡겼는데, 수리비로 2만원이 필요하다고 하길래, 조금 더붙여 보상구매를 하기로 했다. cube가 작고 가볍긴 해도, 그만큼 재생시간이나, 음질, 내구성 면에서 핸디캡이 너무 큰 단점이 있어서 역시 다른 기종으로 갈아탔다. (cube는 벌써 3번째 a/s 였다.)

새로 구매한 mp3p는 T-10으로 알려진 모비블루의 신제품. 4G가 모델인데, 어째 아이팟 터치의 축소형 같다. 압력식 터치스크린을 사용하고 있지만, 쬐그만 화면으로 320x240 해상도의 동영상까지 재생해주는 재주꾼이다. 배터리도 모비블루 라인업 가운데 가장 큰 용량인 녀석으로 선택했다. 4G만 음악 부족으로 고생할 일은 없을 것 같다.

한동안 구매가 뜸했었는데, 갑자기 전자제품으로 왕창 구매를 하니, 아내가 적잖게 당황하는 모습이다. 내 나름대로는 꽤 고심과 오랫동안 저울질을 거친 결과인데...
다시 명절이 찾아왔다. 가족사의 뒷 이야기를 알 게 된 지난 해 이후로 명절이 달갑지만은 않다. 그래도 아내의 입장도 있고 해서, 아침 일찍 일어나 본가로 향했다.

명절 때 만날 가족을 떠올리면 입가에 미소가 어리고,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람들이 있다는데, 본인과는 거리가 먼 다른 나라 이야기이다. 명절이 되면 항상 집안에는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고, 시간이 지날 수록 그 수위가 올라간다. 이날도 숙모와의 마찰로 인해 숙부님 가족들은 거의 정오가 되어서야 합류를 했고, 이로 인해 오전 내내 유쾌하지 못한 분위기가 집안을 지배했다. 본인이야 늘상 겪는 일이니 익숙하기까지 한 일이지만, 아내가 이런 분위기에 적지 않게 당황하는 것 같다.

항상 명절 때 친척들이 모이면, 먹고 TV보는 것이 전부였던 패턴을 깨보고자 몇년 전부터 보드게임을 들고가기 시작했는데, 올해 명절에는 그 목적이 좀 바뀌었다. 어색해지는 분위기와 굳어지는 내 마음을 감추고 싶은 것이랄까. 사실 숙부님 가족들은 재작년의 포뮬라 드 영향으로 보드게임을 아주 달가와하지는 않는 눈치이다. 그래서 항상 점심만 먹고 한 두시간 뒤면 어떤 핑계로든 귀가해버리곤 한다. 설이나 추석 당일 늦게 와서 점심만 먹고 돌아가는 일. 이것이 숙부님 가족의 명절 보내기이다.

이번 설에는 평소 자주 보기 힘들었던 친척들이 많이들 찾아왔다. 큰 고모의 장녀인 일임이 내외가 벌써 4살이 된 아들과 함께 찾아왔다. 그리고, 순천에 거주하느라 명절 때 거의 얼굴을 볼 수 없었던 큰 고모님도 찾아오셨다.

조카가 되는 일임이 아들은, 또다른 조카인 예은이(본인 친동생의 딸)에게 처음엔 신기한 눈길로 쳐다보더니, 이내 관심의 중심이 자신에서 멀어지는 것을 감지했는지, 견제 심리가 발동한 모양이다. 안 그래도 부모라 맞벌이인지라, 부모의 사랑이 아쉬운 티가 나는데, 유난히 심술을 부리는 모습이 그다지 좋아보이지 않는다. 자녀를 키운다는 것은 정말이지 고도의 집중력과 희생을 요구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이제 명절에 가족간 회동을 하는 일도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들자, 심란했던 마음이 다소 가라앉는 느낌이다.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남편이 본가와 사이가 좋지 않은 집안의 며느리의 어려움을 토로했는데, 많이 미안했다. 그래도 큰 불평없이 명절을 보내준 아내에게 감사하고, 항상 명절 때마다 중노동에 시달리신다는 이유로 뒤늦게나 찾아뵙게 되는 처가 식구들께 송구스럽다. 그래도 모두들 새해에 좋은 일이 많으시길...
지난 주에 Tom Vasel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이라, 점심 먹고 의정부로 출발을 했다. Tom과의 만남에는 여기저기 얽힌 일화가 좀 있다. 우선, 지난번 What's it to Ya의 공동구매 때문에 메일을 주고받게 된 Mike Petty의 소개로 Tom이 먼저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이후로 일정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조금씩 어긋나서 거의 석 달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다시 Mike가 메일을 보내왔다. 내용인 즉, "너희, 아직도 안 만났냐?" 였다. 결국 나와 Tom의 만남이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 같아서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잡았다.

물론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주변의 보드게임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신청자를 모집했건만 역시나 불발탄. 아니 신청자는 있었지만, 이날 오전, 정확히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불발탄으로 판명이 났다. 수원에서부터 불참하는 아빠들을 대신해서 아기 엄마들을 모시고 우리 집으로 올 계획이던 리키마틴님이 아내의 급전을 받고 불발탄을 날렸던 것이다. 사실 이 내용을 이날 오전에 메신저를 통해 민샤님께 전달 받았고, 이후 나와 아내는 의정부로 출발한 것이었는데, 돌아와보니 상당한 오해가 누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오해에 몇 달동안 시달려온 나로서는 앞뒤 안 가리고 모든 채널을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지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 정중한 해명글을 올렸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인간관계에 대해서 점차 자신이 없어지는 걸 느낀다. 정말 칩거에 들어가야할 것 같다.

어쨌든, 의정부까지 가서 Tom과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큰 키에 상당한 덩치의 소유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게다가 다섯 딸의 아버지였다. 집은 거의 촌구석에 있었고, 아주 좋은 집도 아니었지만, 넓이만큼은 상당했다. 게임 보관과 아이들 양육이라는 조건에는 적당한 조건이랄까.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Tom은 나와 같은 나이였다. 나보다 불과 2개월 정도 생일이 빠르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느냐고 묻자, 나더러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했다. (음? 뭘?)

예상대로 엄청난 소장품, 그리고 학교 사무실에도 만만치 않은 소장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상당수의 게임들은 리뷰를 부탁하는 제작자들 덕분에 무료로 공급받는다고 했다. 하긴 그는 개인의 홈페이지 뿐만 아니라 보드게임긱, Funagaindice tower라는 인터넷 방송까지, 보드게임 분석가로서 상당히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정도 특전(?)은 누릴만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소장품 구경에 정신이 팔린 동안, 아내는 Tom의 아이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한국 아이들이라면 으례히 할 것 같은 낯가림도 이 아이들에겐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 같다. 우스개지만, 아이들이 아내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것 같다.

가볍게 한 게임을 하기로 해서, Power Grid를 선택했다. 이번에 출시된 새로운 발전소 카드덱을 사용하기로 했다. Tom에 말에 따르면 발전소가 좀 더 강력해졌고, 확장 게임을 위한 발전소도 추가되었다고 한다. Tom과 그의 아내, 그리고 우리 부부 내외까지 4인 게임으로 진행했는데, 아무래도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는 것 같아서, 내가 좀 서둘러서 종료조건을 만들어버렸다. 내가 다음 라운드 발전에 필요한 자원까지 모두 사놓은 상황인지라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Tom이 적잖게 당황하는 기색이다. 하긴 그는 내 덕분에 그 게임에서 꼴지가 되어버렸다. 본인은 3등이었고, 아내가 1등을 차지했다. 젖먹이 아이를 안고 고군분투했던 Tom의 아내는 2등을 차지했다.

피자로 저녁식사를 해결한 우리는, 아이들이 제법 큰데도, 게임에서는 소외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애들도 할 수 있는 게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Tom이 보관장에서 애들용 게임을 몇 개 집어왔는데, 게임 자체는 그다지 흥미로울 것이 없는 것들이지만, 아이들이 즐거워 하는 걸 보니 우리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섯 아이의 아버지인 Tom은 왠지 좀 아이들이 성가신가보다. 흘흘~ 하긴 나 같아도 매일 다섯 자매들에게 시달린다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게임을 마치자, 아이들이 갑자기 일제히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아내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모양이다. Tom 일가가 슬슬 피곤할 것 같아서 작별을 고하고 귀가길에 나섰다. 그런데 때마침 설 연휴의 시작이라 하행길이 지독한 정체에 거렸다. 약 60여 킬로미터의 거리이고, 길의 대부분이 고속도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의정부로 갈 때는 1시간 정도 밖에 안 걸렸는데, 귀가길에는 무려 3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역시 전날과 마찬가지로 귀가와 함께 우리 둘 모두 뻗어버렸다.
지난 금요일에 아내의 비자 인터뷰 일정을 잡았다. 설 연휴 전에 하려다보니 월-화 양일간 밖에 시간이 없었지만, 마침 비자 신청에 있어 그다지 붐비는 시기가 아니다보니 쉽게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오후 2:30분에 일정을 잡아두었지만, 이런 일이 있으면 항상 긴장하며 서두르는 아내 덕분에 11시도 못되어서 집을 나서야만 했다.

대부분의 서류들은 인터넷과 모사전송을 통해서 받아놓은 상태지만, 2007년도 소득금액증명만큼은 인터넷으로 발급이 불가능했다. 3~4월이 되어야만 가능하다고 한다. 그래서 미국대사관 가는 길에 세무서를 들러서 발급이 가능한가 알아보려고 했는데 일이 좀 꼬였다. 우선 내가 알고 있던 장소가 광주세무서가 아니고 광주시 법원/등기소였다는 점. (광주에는 세무서도 없다고 한다. 흠~) 그래서 마침 미국 대사관 옆에 바로 국세청이 있으니, 그곳에서 발급받으면 되겠다 싶어서 그곳으로 향했지만, 그곳은 조사업무만 할 뿐, 민원 서류는 지방세무서를 이용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종로 세무서에 문의해야만 했고, 오프라인 역시 2007년도 소득금액증명서류는 발급이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얻었다.

날은 너무나 춥고, 차는 신촌에 세워놓고 대중교통을 통해서 오는 길인데다, 이리저리 꼬인 일로 길어진 동선 때문에, 나와 아내 모두 피로함을 느꼈다. 결국 서류 보강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다시 미국대사관으로 들어갔다.

미국대사관은 여권소지자만 출입이 가능했다. 그 때문에 대사관 앞에서 생이별(?)을 해야 하는 커플들이 꽤 있었다. 다행히 아내의 선견지명으로 나 역시 여권을 가져왔기 때문에, 대사관 안까지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문제가 발생했다. 지난 금요일에 촬영했던 비자 신청 사진의 사이즈가 맞지 않는 것! 세상에 사진사가 그런 상식도 모르고 있었다니, 적어도 자기 밥벌이에 관계된 전문 지식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결국 또 우여곡절 끝에 대사관 3층에서 즉석 사진을 찍어가지고 왔다. 서류 접수도 길었고, 인터뷰 대기시간도 길었다. 인터뷰 담당자가 외국인이라는 사실에 아내가 좀 긴장하는 듯 했지만, 옆에 통역관이 대부분의 내용을 통역해주고 있었고, 관광비자 인터뷰였던 지라 은근히 싱겁게 끝나버렸다. 오히려 아내는 인터뷰 불합격된 거 아니냐고 걱정할 정도. 하긴 이미 비자를 가지고 있던 나도 변변한 인터뷰 기억은 없으니, 뭐라 해줄 말은 없었다. 그래도 결격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니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느긋하게 기다리는 일 뿐.

너무 춥고 피곤해서 신촌까지 택시를 이용했다. 택시비 꽤나 살벌하다. 언제부터인지, 택시는 귀족들이나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 된 것 같다.

아내는 신촌에 오면 마음이 편한 모양이다. 아무래도 오랜 서울 생활의 출발점이었으니 그럴만도 하겠지만, 정작 모교보다는 인근 옷가게가 더 끌리나보다. 도저히 아내의 쇼핑까지 따라다닐 체력은 못되는지라, 던킨 도너츠에서 도너츠 몇 개와 핫초코로 혼자 버티기로 했다. 여대 앞인지라, 죄다 여자들, 또는 연인들이었고, 남자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건 나뿐이었지만... 뭐 언제 그런 거 신경쓰며 살아온 것도 아니고...

짬나는 김에 육사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편집부 선배들은 올해 위탁교육을 받는다고 했다. 인철 선배는 몽골로, 기쁨 선배는 서강대로... 내 기억이 맞다면 내년 또는 내후년이면 소령 진급을 하게 될 선배들인데, 이제 위관을 마치고 영관을 앞둔 선배들과 내 모습이 비교가 된다. 이런 건 정말 안하고 싶었는데... 거의 10년째 정체된 내 모습을 보면 좀 위축되는 건 사실이다.

아내가 청바지 하나를 전리품으로 챙겨들고 돌아왔다. 피곤한 서울 나들이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앞뒤 안 가리고 둘 모두 뻗어버렸다.
늦은 오전이 되어서 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가벼운, 그러나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아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MANN님으로부터 한니발:로마 vs. 카르타고의 설명을 들었는데, 너무 매력적인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임이 그렇지만, 특히 역사를 테마로 하는 전쟁 게임의 경우, 많고 적고의 차이는 있지만 추상화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추상화가 많이 진행될 수록 테마는 옅어지는 대신 시스템의 균형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고(예: 바둑, 장기), 반면 추상화가 적게 진행될 수록 테마는 진하게 반영되겠지만, 균형잡힌 시스템을 구현하기 힘들어진다. 사실 전쟁이라는 것이 균형잡힌 양자간에 진행된 적이 거의 없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를 테마로 한 게임에서 결론까지 역사적 결과와 동일하게 만든다면, 누가 게임을 하려 들겠는가? 어쨌든 간에 테마와 시스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언제나 게임 디자이너에게 큰 숙제건만, 이 게임은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설명만 들은 시점에서 조금 성급한 감은 있지만, 게임에는 역사적 사실이 비교적 듬뿍 담겨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장수들의 특수 능력, 지형과 부족의 특징, 그리고 시대적 흐름에 따른 특수성(아프리카누스의 등장 같은..) 등이 게임의 사실성을 충분히 살려준다. 게다가 로마와 카르타고가 비교적 팽팽한 상황전개를 보인다는 점에서 시스템의 균형 역시 잘 잡힌 듯 하다. 한동안 로마사에 몰입했던 나로서는 충분히 흥분할만한 게임이다. 하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일단 2인 게임인 한니발: 로마 vs. 카르타고는 접어야 했다.

3인 게임은 은근히 게임을 고르기 애매하다. 아내는 ALEA의 명작들, 특히 플로렌스의 제후를 간절히 원했지만, 3인 게임은 2인 게임만도 못하다는 세간의 평 때문에 채택되지 못했다.

전날 손님방, 즉 게임이 잔뜩 진열된 방에서 잠을 청한 MANN님은 사실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인 즉, 평소 궁금했던 게임들의 규칙서를 읽어보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데, 그 덕분에 배우게 된 게임이 하나 있다. 바로 로마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만든 유스티아누스 황제에서 이름을 딴 레오 콜로비니의 [Justinian]이 그것인데, 사실 테마와는 크게 상관없는 줄서기 게임이다. 아마도 로마의 역대 황제들과는 달리 동양의 절대 군주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는 유스티아누스의 이미지만 차용한 듯 싶다. 말하자면 길어지지만, 결론적으로 유스티아누스 황제에게 누가 더 강한 연줄을 대느냐 하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3인 게임이 너무 심심하다. 3명 가운데 1~2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나머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세력 관계의 판도를 뒤집을 수가 없다. 게임 인원이 3~4인 전용이라고는 하지만, 4인 게임에서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5~6인은 되어야 좀 활발한 세력 이동이 생기지 않을까? 어쨌거나 세력 이동이 활발하지 않은 상태라면, 처음에 뽑아온 카드의 운이 클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세력 판도 변경 결정시기를 정하는 사람이 중요해지므로, 더더욱 세력 이동은 경직될 것이다. 어쨌거나 3인 게임으로서의 이 게임의 가치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MANN님이 독어 독해 능력이 출중한 덕분에 생각치도 않은 게임을 배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겠지만, 다시금 한번 살펴봐야 할 정도로 좀 헛점이 보이는 게임이었다. 레오 콜로비니와 팔랑스의 화려한 구성물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첫 인상이었으니 말이다.

뭔가 게임을 더 한 것 같은데, 기억 나는 건 이 정도다. MANN님의 여자친구인 뮤님의 호출로 MANN님이 급히 복귀를 하면서 이 날의 모임은 끝이 났다. 이 때가 대략 오후 5시 경.

내일 미국 대사관에 가야 하는데, 대사관에는 주차시설이 없다고 한다. 광화문 일대에서 주차하기가 그리 녹록치 않을테고, 인근 종로 구청이나, 세종 문화회관도 살인적인 주차요금을 받는 곳들. 한참 인터넷으로 주차 가능 시설을 뒤져본 결과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난 여행으로 탄력받은 우리는 주변의 보드게임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M.T.를 획책해보기로 했으나, 아무도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서 무산되었다. 시간적 여유를 두고 추진하는 것도 생각해보았으나, 내 주변 보드게임 애호가들은 여유를 사랑하는 이들임과 더불어, 적극적인 호응까지도 절제(?)하는 미덕을 갖추고 있어서, 장시간 신청을 받았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 같다. 이는 지난 1년여 동안 해외 공동구매를 추진하면서 깨달은 바, 화끈하게 단기간 추진으로 반응을 살펴본 것인데, 역시나 좀 성급했던 것 같다. 게다가 아내의 방학은 설 연휴와 함께 끝이 난다. 이로써 매 휴가철마다 단체 여행 및 M.T.에 대해 품었던 계획은 구상단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무산된 셈이다. 앞으로 수년간은 이같은 기회를 갖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많이 아쉽다.

마침 MANN님이 방문의사를 갑자기 밝혀서 토요일 모임을 갖게 되었다. 본래 M.T.를 가려고 생각한 날이라 다른 이들에겐 예고를 한 바 없는 번개가 되었지만, 그래도 몇 명은 참석을 해줄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역시 내 헛된 기대였음이 곧 드러났다. 모임 참석자는 MANN님이 유일했다.

아내가 보드게임에 대한 흥미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었고, 모임주관이 갈수록 피곤함을 더해주고 있던 터라, 사전 예고를 통한 모임은 사실 상 우리 집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었고, 거듭된 졸속 번개형 모임은 결국 아무도 찾지 않는 집으로 바꾸어 놓았다. 내가 주관하는 공동구매도 끊어진 상황이니 거리도 먼 이 곳을, 더 이상 사람들이 찾을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연이은 번개 초대에 대해 다소간의 불만을 표현한 이도 있었으니, 이 또한 본인이 초래한 일이라 뭐라 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한국과의 인연은 몇 가닥 남아있지 않다는 것이 새삼 느껴진다.

모든 게임이 3인게임으로 진행된 이 날의 모임은 기실 몇 게임 못한 채 막을 내렸다. 아내가 MANN님을 부르면서 "밤샘도 가능!"이라고 호기롭게 외쳤으나, 정작 밤샘을 각오하고 온 MANN님이나, 아내는 물론, 나까지도 이제 밤샘은 무리인 것 같다. 새벽 1시를 기점으로 모두들 기력 소진의 증세가 역력해서, 다음 날을 기약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MANN님은 손님방에서 자리를 마련해드렸다.

p.s. 시간이 좀 흘러서 기록을 남기려다보니 무슨 게임을 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그리콜라와 BRASS는 한 것 같은데, 다른 게임은 영 기억이...
전날 일찍 잠이 든 덕분에 좀 일찍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날도 춥고 해서, 콘도의 조식을 먹은 후로 다시 숙소로 돌아와 방안의 따뜻함을 만끽하게 되었다. 어째 여행을 떠나도 집에서의 패턴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듯 하다.


항상 여행을 다녀오면 하는 이야기지만, 역시 집이 최고다. 하지만,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집을 떠나고 싶어하겠지. 후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