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사건을 공개 커뮤니티에 올린 결과, 많은 분들이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시거나, 도움을 주시겠다는 의사표시를 해오셨다. 심지어는 한국의 다른 사이트에 옮겨지며,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독일의 암울한(!) 현실”을 알리는 근거자료로 쓰였다고도 한다. 이에 그분들께 감사의 말씀을 전함과 아울러 결과 보고를 해야 할 책임을 느끼는 바 이렇게 몇 자 적고자 한다.
일단 말도 없이 휴가를 떠난 담당 변호사는 중간에 대리 변호사를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는 형태로 일을 진행시켰고, 나름의 해결책을 내어놓았는데, 그 해결책이라는 것이 정말 어처구니 없게도 회사에 적정 금액을 지불하라는 것이었다.
피해는 내가 보았는데, 돈은 내가 지불해야 한다는 변호사, 그것도 필자가 고용한 변호사의 견해를 들었을 때, 허탈함은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이 나를 대변하는 변호사인지, 상대방을 대변하는 변호사인지 의심스러운 정도였다.
하지만, 해당 사건으로 심신이 피폐해진 필자는 어떻게든 빨리 해결하고 싶은 마음에, 그 말도 안되는 조건을 수락하기로 했는데, 그마저도 중간에 금액이 올라가버려서 결국 100유로가 넘는 금액을 회사에 지불하는 걸로 결론이 났다. 이 과정에서 처음 변호사의 수임료로 이야기했던 금액은 50유로에서 100유로로 껑충 뛰면서, 필자의 총 지출금은 200유로 정도가 되었다.
평소 센트단위의 돈까지 비교 검토하며 물건을 구매하던 필자와 필자의 아내에겐 무척 속쓰린 상황이었지만, 독일 생활에 필요한 귀중한 교훈을 얻은 수업료라고 생각하며 애써 위로하기로 했다.
이왕 수업료라고 생각한다면, 많은 걸 배워야 하기에 이 문제로 아내와 꽤 자주, 오랫동안 토론을 거듭했고 이를 통해 중요한 걸 깨우치게 되었다. 바로 두 번째 기회라는 말의 의미이다.
평소 필자의 기질대로라면, 아무리 심신이 피폐해졌다 하더라도 끝까지 투쟁해서 옳다고 믿는 바를 검증하고자 했을테지만, 그 말도 안되는 조건을 수락한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변호사가 말하길, 독일 법에 따르면 회사와 소비자간의 문제가 발생한 경우, 소비자는 회사가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적어도 두 차례 주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즉, 회사는 필자에게 새로운 모뎀을 보내줌으로써 첫 번째 기회를 가졌지만, 이후 새로운 조치를 취할 기회를 필자로부터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필자가 수차례 전화와 편지로 불편함을 호소했지만, 결과적으로 필자는 그들의 두 번째 조치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 계약 해지를 요구했기 때문에 필자에게 과실이 있다는 말이다.
사실 한국적 사고와 한국법 지식만을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는 납득하기 힘든 말이지만, 논리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라야 하니까, 독일법이 그렇다는데야 더 반박하기 힘든 상황이었던 것이다.
이 두 번째 기회라는 말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필자가 예전에 어느 신문 기사에서 유명인사들의 좌우명에 관한 기사를 읽었는데, 그때에도 “누구에게나 두 번째 기회를 주어라.”라는 좌우명을 본 기억이 있다. 두 번째 기회. 우리에겐 다소 생소하지만, 서구 문화권에서는 꽤 익숙한 개념인 것 같다.
사실 한국에서는 두 번째 기회에 대해 그다지 너그럽지 못하다. 오히려 “유일한 기회”, “마지막 찬스” 등 심리적으로 벼랑에 몰아가는 말들은 범람하지만, 한 번 실수를 범한 사람에게 재차 기회를 주는 고즈넉한 광경은 그다지 일상적이지 않다. “한 번 실수는 병가(兵家)에 흔히 있는 일(常事)”이라는 말은 정작 군대에서도 잘 먹혀들지 않는 책속의 금언이다.
이런 한국적 환경에서 나고 자란 필자 역시, 마지막 기회라는 말에는 익숙하지만 두 번째 기회라는 말은 어쩐지 생소하게 들린다. 한 번 해보고 실패하면 이를 거울 삼아 더욱 보완하여 더 나은 결과를 만들라는 말은 학창시절에는 많이 들었지만, 정작 적용의 대상이 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 번의 실수 또는 실패는 “낙제”라는 말로 바뀌어 낙인이 찍히곤 했으니까.
한 번 실패를 경험한 사람이 다시 같은 실패를 경험할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이전보다 더 잘 할 확률이 높을까? 아니 그보다 실패라는 경험을 가진 자와 아무 경험도 없는 자를 비교해야 할 것 같다.
실패도 경험이고, 오히려 성공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값진 경험이다. 하지만, 그런 귀중한 경험도 이를 활용할 두 번째 기회가 주어지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워낙 인적자원이 남아도는 국가이기 때문일까? 이 사람이 안되면, 저 사람에게 맡기면 되니까? 이는 인간에 대한 시선의 차이에서 더욱 극명하게 대비된다. 두 번째 기회를 보장하는 사회에서의 인간은, 경험으로 학습하고 성장하는 인격체지만, 유일한 기회만 주어지는 사회에서의 인간은 소모품에 불과하다.
무한경쟁과 기회의 한정적 제공은 사회 구성원을 피곤하게 만든다. 한국 사회가 점차 극도의 스트레스 상태를 보이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른 국가의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1~200년 된 건물을 찾는 것이 어렵지 않은 베를린, 정도(定都) 600년의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지만, 지은 지 30년만 지나도 재개발을 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는 서울. 두 번째 기회라는 인식의 유무는 단순히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이처럼 사회 곳곳에서 두드러진 차이점을 만든다.
실패 후에 주어지는 두 번째 기회. 개인에게 있어서는 작은 시도일지 모르지만, 이는 사회적으로는 큰 변화의 시작이 될 것 같다.
덧붙임 #1
당시 염려해주신 많은 분들 덕분에 아직 독일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그 분들께 마음에서 우러난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다.
덧붙임 #2
원래 여기에서 글을 맺고자 했으나, 문득 중요한 예외에 해당하는 내용을 언급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벤처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실리콘 밸리도, 벤처 기업 자체의 성공률은 한국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굴지의 성공한 벤처 기업들이 실리콘 밸리에서 탄생할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두 번째 기회와 관계가 있다. 하지만, 또한 중요한 전제조건이 붙는다.
실리콘 밸리에서는 아무리 여러 번 실패한 사람이라고 해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지 않다면, 꾸준히 재도전의 기회가 주어진다고 한다.
즉,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 조건이며, 도덕적 결함은 두 번째 기회 제공의 예외라는 것이다.
예컨대, 말과 행동이 항상 정반대이며, 기업인으로서도, 공직자로서도 항상 도덕적 결함 투성이었던 전과 십수범을 국가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앉힌 것은, 두 번째 기회의 너그러움이 아니라 어리석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두 번째 기회가 고국 사회에도 널리 허용되었으면 하는 필자의 의도가, 오독(誤讀)으로 인해, 절대로 다시 기회가 주어져서는 안되는 이들에게까지 기회를 주는 빌미가 될까 염려되어 몇 자 더했다. 마침 시기적으로 “다시” 기회를 달라고 할 사람들이 많을 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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