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바야흐로 4시를 향해 가고, 우리는 자리를 식탁으로 옮겨 주린 배를 채우기로 했습니다. 사실 제목과 같은 tea
time은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였고, 다른 사람들은 라면 타임이었지요. 거만이님은 컵라면은 싫다면서 계속 차만
마셨습니다.
차와 라면의 앙상블 속에서 가벼운 신변잡기가 오갔습니다. 가장 민감할 듯한 나이 이야기가 나왔었는데, 삑사리님 내외분은 4살
터울이시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잠깐의 놀라움 속에 빠져있을 때, (어떤 의미의 놀라움이었을까나? ^^;) 삑사리 부인님이
신혼여행 에피소드를 들려주시더군요. 나이에 얽힌 약간의 억울함이 담긴 사연이었다나요. 핫핫~ 동갑내기 연인을 두고 있는 저로서는
살짝 부럽~ (퍼억~!!!)
신혼여행으로 시작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아직 싱글이신 거만이님의 여자관계(?)로 이어졌습니다. 자세한 것은 후기에서 말할 수
없는 내용이지만, 그의 연애관(?)의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게 되더군요. 따라서(!) 곧 저처럼 좋은 연인을 만나시게 될 거라
믿습니다. 크핫핫~
다음 게임을 정하는 과정에서 많은 견해들이 오갔습니다. 일단 장중한 게임을 한 직후였기 때문에 가벼운 게임을 하자는 공감대는
형성되었지만, 그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꼈습니다. [플로렌스의 제후], [푸에르토 리코] 등이 거론되었으니까
말이지요. 무서운 분들….
결국 이어지는 게임으로 레오 콜로비니와 부르노 파이두티의 [바방크]가 선택되었습니다.
2. 바방크
바방크에 대한 소감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블러핑 게임에 대한 개인적인 느낌을 간단히 이야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본인이 해본
블러핑 게임은 여러가지가 있으나, 대부분 [가볍게 시간 때우기 좋은 게임]이라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블러핑이
사실상 전부인 게임(바퀴벌레 포커, 차오차오 등)의 경우 한 자리에서 여러 번 돌릴 만큼 깊은 재미를 주지는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요. 하지만, 이번 모임 이전의 모임(보더님, 츙님과 함께 한)에서 차오차오를 해보고는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심리전의 대가들과 마주 앉아서 블러핑 게임을 하면 그 어떤 게임보다도 깊은 몰입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지요. 전략게임
못지 않은 두뇌싸움과 더불어, 웃음 바다와 엔도르핀의 홍수 속에서 가슴 속 깊은 곳의 근심까지도 녹아버리는 느낌이랄까요. 정작
저 자신은 다른 사람에게 잘 들키면서도, 그 과정의 두뇌 싸움이 너무나 즐거웠습니다.
바방크 역시 블러핑이 주된 소재입니다. 다른 요소들도 있지만, 내가 노리는 수를 상대에게 들키지 않아야 함과 동시에, 상대에게
거짓을 참이라고 믿게 만들어야 이길 수 있습니다. 따라서 게임 진행 과정에서 무거운 침묵이 흐른다면 재미가 반감합니다. 적절하게
분위기를 띄울 수 있는 누군가가 존재한다면, 최상의 게임이 되더군요.
게임의 규칙은 다이브다이스의 리뷰를 비롯해서 많은 이들이 언급했으므로 생략합니다. 이 날 게임은 3라운드에서 꼴찌를 달리다가,
결국 마지막 라운드에서 ⅹ2를 두 번이나 먹은 제가 승리했습니다. 1~3라운드에서 1등이었던 삑사리님은 대추락을 면치
못하셨지요. 거만이님과 제 연인의 치열한 수싸움이 이 게임의 백미였습니다. 교묘한 유혹으로 자신의 치트 카드 자리에 거만이님의
말을 끌어다 놓은 제 연인의 승리였지만 말이지요. 핫핫~!
3. 보석과 부(Edel, Stein & Reich)
연이어서 달린 게임은 알레아 작은 박스의 [보석과 부(富)]입니다. 혹자는 가위바위보 시스템이라며 폄하하기도 하지만, 사실
가위바위보만큼 간단히 승패를 겨룰 수 있으면서도 묘한 심리전이 흐르는 게임이 또 있겠습니까? 아무 생각 없이 가위바위보를 하는
사람에게 ‘심리전’이라는 표현은 우습기 짝이 없겠지만, 통계에 근거(?)하여 상대의 수를 예측해야만 하는, 더 나아가 블러핑을
쓰는 상대를 만났을 때는, 허허실실(虛虛實實)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가위바위보는 아주 훌륭한 게임이라 생각합니다.
보석과 부는 이러한 가위바위보의 특징을 더욱 구체화시킨 게임입니다. 각자의 앞에, 자기 수에 따른 이득을 보여주고 나서 수싸움을 해야 하니까 말이지요. 게임은 이렇게 진행됩니다.
매 라운드 시작 시 각자의 앞에 카드를 한 장씩 펼쳐줍니다. 카드에는 보석그림과 돈의 액수가 적혀있습니다. 그리고 한 장의
이벤트 카드를 펼칩니다. 참가자들은 돈, 보석, 이벤트 카드 가운데 한 가지를 정하고 동시에 공개합니다. 만일 뭔가(돈, 보석,
이벤트 카드)를 노리는 사람이 딱 한 명인 경우, 그건 그의 차지가 됩니다. 3명 이상 같은 걸 노리면 아무도 갖지 못하지요.
2명이 같은 걸 노린다면, 이제 협상이 시작됩니다. 쉽게 말해, “이거 먹고 떨어져라.”라는 내용의 협상이 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과정에서 치열한 눈치싸움이 전개된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노릴 수 있는 결과물이 테이블 위에 펼쳐지기 때문에,
가위바위보보다는 훨씬 구체적인 예측이 가능합니다. 가위바위보를 심리전이라 생각하는 사람에겐 정말 재미있는 순간이지요.
게임을 진행하다보면 각자의 스타일이 드러납니다. 우선 삑사리님은 뚝심형 스타일이더군요. 다른 사람이 뭘 선택하든 개의치 않고, 우직하게 밀어부치는 스타일. 덕분에 최종 라운드 때 가장 많은 보석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삑사리 부인님은 신중형입니다. 상대와의 충돌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러가지로 골똘히 많이 생각하시더군요. 그렇다고 해서 충돌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덕분에 아무런 충돌이 생기지 않는 [자유선택]을 꽤 많이 내셨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제 연인은 과감형입니다. 역시 골똘히 많이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안정지향적인 카드를 내시는 삑사리 부인님과는 달리, 충돌이
생길 거라는 걸 알면서도 피하지 않더군요. 덕분에 꽤 많이 잃어야만 했습니다. 왜냐구요? 거만이님의 스타일 때문이지요.
거만이님은 배짱형입니다. 자신이 카드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보다, 타인이 간절히 원하는 것에 같이 따라감으로써, 왕창 뜯어내는
스타일이더군요. 뭐 북한의 외교방식과 많이 닮아있는 것 같지만, 게임의 정체와 타인의 심리를 잘 파악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한
플레이 스타일이라고 할까요. 덕분에 게임이 활활 타올랐습니다. 원래 적당히 딴지를 즐기는 사람이 있을 때 게임은 제대로 타오르는
법이니까요.
이런 다양한 스타일의 게이머들 덕분에 이 게임은 제대로 된 심리전 게임이 되었습니다. 제가 3번 정도 해봤지만, 이 날처럼 즐겁게 돌렸던 적은 없었으니까요.
4. 데모크레이지(Democarzy)
서서히 아침 해가 떠오를 무렵이 되었지만, 아직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던 우리들은 다시 테이블에 앉았습니다. (졸음을
호소하시면서도, 계속 “한 게임 더~”를 외치신 삑사리님의 정신력에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 아무래도 신중한 전략게임은
시간상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떠들썩하게 웃을 수 있는 파티 게임인 데모크레이지(Democrazy)를 꺼내들었습니다.
블루 박스 시리즈들이 대부분 언어의 압박이 있지만, 데모크레이지는 유독 심합니다. 카드에 쓰여진 내용을 100% 이해하지 않으면, 아예 게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나 할까요. 카드에 쓰여진 내용이 곧 게임의 규칙입니다. ^^;
사실 게임에서 정해진 규칙은 딱 2가지입니다. 진행방식과 종료조건. 그 밖의 모든 것들은 게임 진행과정에서 투표를 통해 정해야만
합니다. 심지어는 종료 후 점수 계산 방식까지 말이지요.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 카드에 쓰여있습니다.
규칙의 가변성이 너무나 독특했고, 그 방식이 투표라니…. 새로운 것을 좋아하는 저는, 이 게임을 돌리기 위해 한글화 자료를
찾았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없더군요. 직접 번역과 편집을 시도했습니다. 뭐 날림 번역에 허접한 한글화지만, 그럭저럭 게임을
돌릴 수 있을 정도는 되더군요. 처음 분당에서 돌려보고, 만족스러웠기에, 이날 다시 꺼내봤습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습니다. 모두들 규칙의 이해도가 매우 높았고, 특히 조금 골치가 아플 법한 대세규칙을 의외로 쉽게
이해하시더군요. 대세규칙이란, 투표 결과에 따라, 찬성/반대표를 던진 사람이 각각 칩을 얻거나 잃는 규칙을 말합니다. 대세 순응
규칙이 적용되고 있으면, 가결시 찬성표를, 부결시 반대표를 던진 사람이 칩을 얻게 되는 것이고, 대세 역행 규칙이 적용되고
있으면, 반대로 가결시 반대표를, 부결시 찬성표를 던진 사람이 칩을 얻게 됩니다. 이 규칙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 냅니다.
거만이님의 경우가 그러했었습니다. 새로 표결에 부쳐진 규칙이 가결될 경우, 거만이님 혼자만 막대한 피해를 입는 상황이었지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가 없었던 규칙이므로, 대세는 당연히 찬성이었습니다. 거만이님은 고심끝에 자기 살을 깎는 규칙에 찬성표를
던지시더군요. 대세에 역행해서 추가로 칩을 잃는 것만은 피해보려는 눈물 겨운 선택이었던 것이지요. 이래저래 골치아프다고 생각한
거만이님이 [모든 규칙 폐기]를 투표에 상정하셨지만, 무참히 부결되었었습니다. 핫핫~. 너무 독주를 하셨기에 모두의 견재 대상이
되셨었던게지요.
그렇게 게임 내내 선두를 달리셨지만, 이 게임의 제목이 뭡니까? 민주주의(Democracy)와 광기(crazy)의 합성어
아닙니까? 막판에 소유 칩을 2개만 남기고 다 버린다는 규칙이 가결되면서, 게임은 도로 원점으로 돌아왔습니다. 핫핫~. 원래
대중(大衆)의 마음은 갈대와 같은 것이고, 그 갈대에 모든 것을 맡겨야 하는 민주주의는 어쩔 수 없이 광기를 내재하고 있는
것이지요. 디자이너인 부르노 파이두티씨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바로 그런 내용이 아니었을까요? 실컷 웃고 떠들면서 진행된 게임은
단 한 사람만이 마이너스 점수가 아닌 상황이 벌어지면서 끝이 났습니다. 누굴 원망하겠습니까? 모두가 만든 규칙에 따른
결과인걸~. ^^;
5. 마치며…
데모크레이지를 끝으로, 모임은 막을 내렸습니다. 이미 날은 환하게 밝은 상태였고, 다들 피곤한 상황에서도 귀가를 재촉하시더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던 탓에, 방에서 눈 좀 붙이셨다가 출발하시라고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답니다. 밤샘 후 운전이 얼마나 힘드는지 잘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다음에는 피곤하시면 눈 좀 붙이셨다가 가세요. 특히 운전하셔야 하는 경우에는 말이지요.
후기를 거의 한 달여에 걸쳐서 작성하는 바람에 몇 가지 빼놓고 언급하지 않은 게임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10여
개의 게임을 돌렸지만, 그 중 재미있지 않았던 것은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오히려 기존의 선입관을 확 바꾼 게임들도 있었으니,
역시 보드게임은 참여하는 사람에 따라 많이 변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게 되었지요.
모처럼 마음껏 웃으며 즐거웠던 시간. 욕심 같아서는 매주 모시고 싶지만, 다들 사정이 여의치 않으니 어렵겠지요. 다시 기회가 되면, 더 멋진 게임을 찾아내는 시간을 만들어 보고 싶네요.
개인적으로 전쟁에 관심이 많습니다.
제가 몸담았던 교육기관의 성격 때문이기도 하고, 역사를 읽어내는 코드로 전쟁만큼 흥미로운 것도 드물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죠.
따지고 보면 보드게임에 제가 심취하는 건 역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게임들이 많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수 있겠네요.
어쨌거나 전쟁, 그것도 역사 속 전쟁을 게임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여러모로 제겐 가슴 설레는 일입니다.
박스 모습
십자군의 이름으로(Im Zeichen des Krenzes)라는 게임은 십자군 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십자군 전쟁에서 많은 활약(?)을 했던 5명의 영주(군주)들 가운데 하나가 되어 이슬람에 정복된 예루살렘을 탈환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살라딘을 주인공으로 선택할 수 없다는 점이 다소 아쉽기는 해도 오직 “기독교 만세”만을 외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에
그 아쉬움은 상쇄될 수 있었습니다. 무슨 의미인가 하면, 일반적인 전쟁 게임의 경우 적과 아군으로 나뉘어 서로 상대해야 하는
구도를 취하고 있지만, 이 게임은 참가자 모두 십자군의 일원이 되어 예루살렘 회복이라는 공통의 목적을 향해 가기 때문에 얼핏
보기엔 “기독교 만세”의 협동게임처럼 보여집니다. 하지만, 실제 게임을 하면, 절대로 그렇지 않다는 것이 이 게임의 매력입니다.
전
사(戰史)적 관점에서 보면, 십자군 전쟁은 명분과 실제 목적이 다른 대표적인 전쟁으로 손꼽힙니다. 교황이 성지 회복을 외쳤고,
많은 기사와 영주들이 이에 호응하여 군대를 일으켰지만, 실제 목적은, 당시 막대한 부의 원천인 동방에서 한 몫 챙겨보려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탐욕스런 동기였던 것이지요. 많은 전쟁들이 명분과 실제 목적이 다르지만, 이 십자군 전쟁에서 특히 두드러졌던 이유는,
적(敵)이었던 이슬람 군대가 십자군의 계산보다 훨씬 막강했기 때문입니다. 만일 십자군이 승승장구했더라면, 그들의 탐욕은
패자에게서 취한 전리품이 채워주었을 것이기 때문에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슬람 군대는 강했고, 따라서
그들의 명분만으로는 진짜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에 십자군은 돌변합니다. 약탈자로 말이지요.
이 게임은 바로 십자군의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성격을 잘 살리고 있습니다. 기독교 세력의 해방군과 탐욕스런 약탈자의 모습을 둘 다 살렸다고나 할까요.
전투 결과를 만들어내는 전투타워
아울러 전쟁에서 작용하는 우연성과 우발성을 전투타워라는 독특한 시스템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인 견해지만, 주사위
시스템보다 조금은 더 실제 전쟁적인 요소를 잘 구현한 것 같습니다. 설명서에서 “석방된 포로”라는 설명을 읽었을 땐 무릎을 탁
쳤을 정도니까요.
전술(前述)한 바 있는 베네치아라는 게임은 이 게임의 디자이너인 로날트 호프슈태터입니다. 게임이
좋으니, 디자이너를 기억하게 되었고, 그 결과 묻혀있던 또 다른 게임을 발견하게 된 것이죠. 이 게임이 얼마나 제게 마음에 와
닿았는지 아시겠지요? ^^;
개인 야영지와 요약표
사실 개인적으로 꽤나 공을 들이기도 했습니다. 제목부터 느낌이 나지만, 이거 독어판입니다. 독어판 게임이 하나
둘이겠냐마는, 각종 글귀가 난무하는 카드와 요약표 등은 이 게임을 손에 넣고도 오랫동안 처박아 둘 수 밖에 없었던 이유이기도
했지요. 암튼 우여곡절 끝에 한글화 자료와 설명서를 입수했지만(비X 스X블님 땡큐~), 설명서가 독어 설명서의 글씨만을 한글로
번역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에(심지어는 그림의 풍선속에 들어있는 글씨까지도 별다른 표시 없이 국어만 적혀있음), 다른 설명서에
비해 선뜻 손이 안 가더군요.(만드신 분(누군지 아직 모름. -_-;)의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고맙지만서도….) 어쨌거나 모임을
갖기로 마음 먹었고, 모임에서 돌리겠다고 마음 먹은 다음에야 손을 댔기 때문에 짧은 시간, 많은 수고를 들이게 되었습니다.
카드도 한글화 시켰고, 설명서도 원문 설명서랑 나란히 놓고 그림과 대조해가면서 해독(!) 작업을 했습니다. 무엇보다, 긱에
올라와 있던 영문 요약표를 짧은 컴퓨터 실력으로 한글화시켰다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대견하다고 할까요. 험험~
어쨌든 게임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유럽대륙의 지도가 중세분위기로 그려진 게임 판에 십자군 표식 5개가 올라가고, 도시 표식이 올라갑니다. 도시 표식은 이슬람
도시와 기독교 도시로 나뉘고, 표식 뒤에는 약탈 시 얻게 되는 보물의 숫자가 적혀 있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는 이슬람 군이
무려 15개나 올라와있습니다. 십자군이 출정할 때 대부분 3~5개의 부대만을 거느리기 때문에 15개 부대는 결코 적은 부대가
아니지요. (게다가 게임 진행하면서 예루살렘에는 이슬람군이 계속 증원됩니다.)
십자군들은 게임 판에 그려진 지형과
같은 지형카드를 통해 부대를 이동시키고, 적을 만나면 전투를 합니다. 그리고 도시에서 이동을 멈추면 도시에서의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이슬람 도시는 오직 약탈의 대상이며, 기독교 도시에서는 세 가지 행동을 할 수 있습니다. 부대의 사기를 올려주는
기도, 부대원을 증원하는 군대 모집, 그리고… 약!탈!
십자군이 기독교 도시를 약탈하는 이 설정이야 말로 십자군의 성격을 잘 살린 겁니다. 그런데, 이 약탈은 도저히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나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도저히 기독교 도시를 약탈할 수 없어~!”라
고 외치며 오직 예루살렘만을 향해서 돌진하는 사람은, 막강한 이슬람군에 치여서 패배의 쓴 잔을 들이켜야 합니다. 부대는
부족하고, 부대를 모을 수 있는 보물도 부족하고, 이슬람 도시는 기독교 도시에 비해 거리도 멀고 방어력도 높습니다. 어쩝니까?
만만한 기독교 도시를 털어야죠. 그래도 십자군에게 양심은 있어서, 기독교 도시에 대한 약탈은 성공/실패 여부를 묻지 않고 사기치
-3을 초래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탈은 매력적이니, 기가 막히게 잘 구현된 게임 시스템입니다.
하지만, 적은
이슬람군만이 아닙니다. 수시로 해적과 이슬람군을 내 쪽으로 몰아주는 것도 모자라, 아예 직접적인 방해를 일삼는 다른 십자군들
또한 잠재적 적군입니다. 게다가 예루살렘을 먼저 공격하는 쪽에게 교황이 화끈한 보너스까지 얹어주니까, 약간의 레이싱적 요소까지
담고 있다고나 할까요?
어쨌거나 5명 모두 처음 하게 된 이 게임은, 본 후기만큼이나 장황한 본인의 설명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상황과 진행을 참가자별로 요약해보면,
삑사리님 ? 프
랑스 일대에서 출정하여, 보무도 당당하게 이베리아 반도를 향해 나아갔으나, 다른 십자군의 방해공작으로 그라나다 일대에서 활동중인
이슬람군과 격돌하여 장렬히 패배. 곧, 군대 수 0의 비극이 찾아왔으나, 액션카드의 도움으로 다른 십자군들로부터 2개 부대씩
갈취(!)하게 되었음. 갑자기 8개 부대로 증원되자 오기가 발동하여 이슬람군에게 맹렬히 달려들었으나, 약 5회의 전투 가운데
이긴 것은 단 한번. 바로 군대 수 0의 상황으로 몰림. 잦은 패전으로 사기치는 바닥을 치고, 낮은 사기치는 카드의 재보급에
제약을 주기 때문에 후속 행동마저도 여의치 않은 상황. 이후 그는 이베리아 반도를 한동안 전전하다가 간신히 재기하여 북아프리카
일부로 나아갔음. 하지만, 게임 시간의 약 80% 가량을 혼자서 이베리아 반도에서 고군분투한 덕분에 “이베리아 반도의 해방자”라는 명예로운(?) 칭호를 얻게 됨. (게임의 목적지를 망각한 것이 아니냐는 핀잔도 더불어….)
삑사리 부인님 ? 남
부 독일에서 출정, 착실한 약탈로 순식간에 보물 상자의 숲에 파묻힘. 막대한 재력을 바탕으로 더 이상 동원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대를 동원했고, 다른 십자군들의 활약이 지지부진한 틈을 타, 예루살렘을 단 두 번의 공격만으로 격파함. 이를 견재 가능했던
유이한 두 사람이 서로 견재하느라 바쁜 틈을 탔다는 설이 유력함.
제 연인 ? 가장 먼 영국에서 출정,
기나긴 원정거리를 착실하게 밟아나갔으나, 삑사리님의 의외의 카드 플레이로 콘스탄티노플에 발이 잠깐 묶였음. (자신은 이베리아
반도에 있으면서 콘스탄티노플을 봉쇄할 건 뭐람? ^^;) 잠깐의 주춤함이 있었으나 이내 콘스탄티노플 약탈로 봉쇄 돌파. 예루살렘
공략조건인 이슬람 도시 1개 정복을 달성코자 흑해를 건넜으나, 본인과 거만이님의 태클로 멀리 알렉산드리아까지 건너감. (본인이
한 발 앞서 타르수스를 공략했고, 거만이님은 안티오키아와 트리폴리스에 각각 이슬람군 3개 부대씩을 증원시켰음) 겨우 예루살렘
공략조건이 충족되자 게임이 끝나버림. 이동거리만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최장거리 지그재그 행군을 기록.
거만이님 ?
목적지와 가장 가까운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정하여 가볍게 지중해를 건너 크레타섬까지 상륙. 최초로 예루살렘을 공략하며 게임을
끝내는가 싶었는데, 본인의 치열한 방해공작으로 크레타섬에 갇히게 됨. 참고로 크레타섬은 기본 규칙에서는 약탈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보물 획득과 병력 증원을 위해서는 유럽 본토로 건너가야 함.) 이후, “내 목적? 보물이야! 예루살렘 따윈 관심없어. 교황이 주는 보너스 때문에 잠깐 들렀을 뿐. 이제 고향으로 갈거야~.”를 외치며 크레타섬에 정착함. 게임 시간의 약 6~70%를 크레타섬에 머물면서 오직 본인에게 태클 거는 것에 집중하였다고 함.
본인 ? 북부 독일에서 출정하여, [기도 후 약탈]이
라는 십자군 본연(?)의 모습에 충실하며 차근차근 전진. 기독교 도시를 무려 3개나 약탈하면서 한 때 최고의 부와 무력을 손에
넣었으나, 예루살렘을 향해 쾌속 전진하는 거만이님의 꼴을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해적과 약탈 콤보로 치명적인 태클을
걸어주었음. 이에 그치지 않고, 이베리아 반도와 마르세이유 근교에서 분투중이신 삑사리님 내외께 해적과 이슬람군을 살포시
얹어드리는 바람에, 공공의 적이 되어 아테네 근교에서 떠돌게 됨. 막강한 부대를 거느리고도 변변한 전투 몇 번 못 치르고 게임을
끝내야 했던 비운의 십자군이었다 함.
게임은 협력게임이 될 거라는 통상의 상식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형태로
흘러갔습니다. 특히 예루살렘 코 앞에서 흑해 깊숙한 곳까지 본인을 유배시킨 거만이님과, 이에 사기치를 1로 만들어버리는 회심의
반격으로 맞대응을 가한 본인의 치열한 상호 태클은 게임 내내 십자군의 참모습은 이런 것이다라고 말해주는 듯 했지요. (물론 제
공격은 [신의 손]이라는 카드로 허사가 되었습니다. 상대의 태클을 대비해 치밀하게 대비를 하고 계셨다고 하지요. 그런데 그럼
뭐합니까? 크레타 섬에서 나오질 못하는 걸…. 푸훗~)
전투 타워의 내부
박스 크기(퀸 게임즈 라인업 가운데 가장 큽니다.)가 말해주듯 장대한 스케일의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게임 구조는 매우
쉽고, 진행 속도도 빨랐습니다. 게임 설명을 포함해서 2시간 남짓한 진행시간으로 마음껏 웃으며 즐길 수 있었지요. 특히 전투
타워의 의외성에 모두들 울고 웃고 난리를 쳤습니다. 적을 2개 부대 넣었는데 6명이 나왔을 때는 당사자 한 명을 제외한 다른
모든 사람들이 박장대소했습니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장대한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느라 다소 기력을 소모한 멤버들은 기력 재충전을 위해 식탁으로 자리를 잠시 옮겼습니다.
자연스럽게 멤버들의 자리는 식탁으로
옮겨졌고, 과일과 차를 마시면서 서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첫 이야기의 주인공은 거만이님. 여기가 본래 서울에 일자리를 둔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는 아파트인 탓에 저녁시간의 버스는 항상 만차(滿車)인데, 거기에 터널 공사까지 겹쳐서 곤욕을 치렀다고
하더군요.
특히 옆에 서 계셨던 아저씨의 활약상(?)을 실감나는 말재주로 묘사하는 통에 좌중은 웃음바다가 되었지요.
당시의 성찬...에서 아주 쪼금 연출한 상황...^^;;;
아참~! 빼놓을 수 없는 건 거만이님의 (누구 이름 같은) 고상한 취미랄까요? 특별한 찻잔 세트가 딱 4 pcs밖에
없어서, 나중에 오신 거만이님께는 머그컵을 내놓았었는데, 다른 사람들의 찻잔을 슬쩍 보시면서 한 마디 하시더군요.
“찻잔이 참 예쁘군요. 흐음~”
컵
은 단지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에서 물이 엎어지는 것을 막고, 인간이 마시기에 편리하도록 고안된 도구에 불과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그 말 뜻을 이해하지 못했었습니다만, 제 연인이 얼른 눈치를 채고 V.I.P.(very ignorable
person?)가 아니면 구경도 못한다는 전설의 대나무 찻잔을 꺼내왔습니다. 향나무 받침과 함께…. 그제서야 만족한 거만이님의
한 마디.
“으흠~ 이제야 차 맛이 제대로 나는군요. 찻잔 때문이었나?”
바로 그 전설의 찻잔~!
외모와는 다르게 꽤나 풍류를 아시는구나라고 생각하는 순간, 옆에서 삑사리님이 대화명 해석을 해주셨습니다.
“역시 거만하시구나~.”
그렇게 30여분 웃음꽃을 피운 멤버들은 다시 게임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화려한 5인 게임의 서장을 열었습니다.
4. 모던 아트
5인 게임의 첫 게임은 삑사리 부인님의 강력한 요청에 의해 경매 테마의 최고 게임으로 이름 높은 크니지아의 모던 아트로
결정났습니다. 가난한 본인의 주머니 사정으로 영문 신판밖에는 소장하지 못했는데, 역시 눈 높은 거만이님과 삑사리님은 이에 대해
한동안 성토를 하시더군요. 카드가 딱지 같다는 둥, 이런 가리개로 뭐가 가려지겠냐는 둥….
모던아트 영문 신판의 구성물. 이게 뭐 어때서?
그런 눈 높은 부르주아들의 성토를 막기 위해 등장한 아이템들이 바로… 카지노 칩이었습니다.
그리고 인코그니토에서 패스포트 4장을 조달해서 가림막으로 사용했습니다. 덕분에 Berlin, Paris 등 경매 시장의
이름이 있어야 할 게임 테이블이 첩보영화스러운 패스포트가 난무하는 현장으로 바뀌었습니다. 미술품을 보며 가림막에 적힌 미션을
읽어주는 센스.
모던 아트는 미술상이 되어 위탁받은 미술품을 경매를 통해 판매/구입하여 최고의 수익을 올리는 자가 승리하는 게임입니다.
다양한 경매 방식과 치열한 세력다툼이 게임의 하이라이트지요. 이 날 이 게임을 처음 접한 제 연인을 제외하면, 모두가 현란한
입담을 자랑하는 멤버들이라 케이블TV 못지 않은 광고의 열전이 펼쳐졌습니다. 서로 자기가 내놓은 미술품이 순위권 안에 들거라면서
화려한 CF를 방송하더군요. 특히 삑사리 부인님의 광고는 눈 부셨습니다. 4위로 마감하게 될 팔자의 미술품을 누적 가액 4만
달러의 미술품으로 둔갑시키면서 짭짤한 수익을 올리셨지요. 평소에도 본 방송보다 광고에 시선을 더 뺏기는 본인은, 그러한
과대광고의 희생양이 된 것도 모자라서, [내 미술품 내가 사재기 하기] 신공을 발휘하느라, 3라운드 때는 빈상(貧商) 신세를
면치 못했습니다. 심지어는 매우 매력적인 가격의 고정가액 경매 상품을 전재산을 다 털어서도 구매할 수 없는 사태까지 발생했다고나
할까요. 좌절하고 있는 본인에게 들려오는 한 마디.
“아~ 이거 참~. 어디서 고등어나 팔고 있어야 할 사람이 미술품을 산다고 들어와있는지, 수준 낮아져서 못하겠네. 영세 상인들은 좀 출입금지시켜야 하는 거 아닌가?”
이
말의 주인공이 누군지는 알아서 판단하시라. (읽다보면 힌트가 나옴. ^^;) 고등어 이야기가 나와서 생각이 난 에피소드 하나.
모던 아트를 시작하면서 금액의 단위에 대한 이의가 나왔습니다. 한 자리 숫자들을 부르는 건 너무 쪼잔해 보인다는 겁니다.
명색이, 거장들의 미술품을 경매하는 자리에서 “일~”, “이~” 이렇게 외치는 것은 넌센스인 것이지요. 그래서 원래 게임 규칙
설명서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ⅹ1000을 하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가짜 돈 쓰는 건데, 통 크게 놀아보자는 취지였고, 모두가
동의하고 게임을 재개했는데, 자유 경매를 하면서 삑사리님이 부른 금액은…
“3천[원]”
화
폐 단위가 달러나 유로도 아니고 [원]이라니…. 차라리 [원]을 안 붙였으면 통상의 개념속에서 뒤에 [만]이 생략되어있는 걸로
인식을 하겠건만, 아예 [원]이라는 마침표를 찍었으니…. 순간 다른 멤버들의 항의가 빗발쳤습니다. 그 중에서도 거만이님의 항의가
걸작이었지요.
“가락동 수산시장 고등어 경매하는 자리인 줄 아나? 3천원이라니~!”
여하튼
경매장인지 개그프로 녹화현장인지 알 수 없는 웃음바다 속에서 게임은, 알차게 미술품을 사재기했던 거만이님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한 때 빈상(貧商)의 조롱을 겪어야 했었던 본인도, 끝날 때는 30만이 넘는 거액을 만지는 거상(巨商)의 대열에
들어갔다지요.
시계는 어느덧 새벽 2시를 향해갔지만, 한껏 달아오른 분위기는 더욱 몰입할 게임을 요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꺼내든 게임은 바로….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의 길을 가던, 저와 제 연인은 게임에 대한 갈증에 급기야, 이 격오지로 게임의 대가들을
불러모으기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도 원래 걸려들 예정이었던 비X 스X블님과 보X님, 츙님(아이디가 한 글자라 가릴 수가
없군요. 쿨럭~)이 절묘하게 빠져나가시고, 삑사리님 내외와 거만이님이 그 마수에 걸려들었습니다. 흐흐~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아예 모임이 정례화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워낙 졸필이지만서도, 그 시간의
기억이 너무 즐거운 나머지 이렇게 후기라는 형식을 빌어 광고(!)를 하고자 합니다. 자아~ 그럼 들어가 봅시다.
1. 모임의 배경
사
실 제가 서식(!)하고 있는 둥지는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에 위치한 아파트입니다. 예~ 요새 뉴스에 자주 오르내리고 있는 동네죠.
오포읍 아파트를 둘러싸고 펼쳐졌던 로비전 덕분에 뭐 검찰도 바쁘고, 여러 사람 바쁜가 봅니다. 덕분에 광주는 국회의원과 시장이
패키지로 엘리(elimination)를 당했다죠.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느냐 하면, 그만큼 여기가 좋은 곳이라는
겁니다. 커험험~. 집 앞까지 국도가 뚫려있는 덕분에 분당에서 이곳까지 20여분이면 주파가 가능하고, 서울 강남까지도
3~4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도로환경입니다. 자동차가 없다고 해도, 강변역, 잠실역 등지에서 집앞까지 한번에 오는 버스도
있으니, 더할 나위 없죠.
거실에 놓인 게임 테이블 전경
하지만, 이날 모인 삑사리님 내외와 특히 거만이님은 강한 이의를 표명하실 겁니다. 일단 자동차로 오신 삑사리님은, 아직
네비게이션을 업데이트시키지 않으신 탓인지, 씽씽 달리는 국도를 놔두고, 온갖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난무하는 지방도를 우회하며
오셨더군요. 뭐 제 네비게이션도 과거 그런 업적(!)을 자랑한 바 있으므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거만이님은 의외의 복병에
당하셨네요. 분당-광주 사이의 갈마터널이 밤 10시부터 새벽까지 공사에 들어가기 때문에 지독한 병목현상을 경험하신 거죠.
도착하자마자 죽는 소리를 하시는데…. 흠흠~. 원래 오시기로 하셨던 시각에 출발을 하셨다면 원만하게 도착을 하셨을 겁니다.
거만이님….
밤샘 모임이라 주변이 캄캄해서 못 느끼셨을테지만, 낮에는 꽤 그럴싸한 바깥 풍경이 펼쳐진답니다. 뭐 어떻게 말을 해도 거만이님의 투덜거림은 어쩔 수 없겠지만요. 커험험~
여하튼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모임의 멤버들을 한자리에 모였습니다.
2. 베네치아
주
중에 [십자군의 이름으로]라는 게임을 한글화 및 규칙 숙지를 위해 오랫동안 보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전쟁게임이 주사위로 그
의외성을 표현하는데 반해, [전투타워]라는 독특한 도구로 그 의외성을 구현한 것이 신선했다고나 할까요. 자세한 것은 [십자군의
이름으로] 게임 후기에 말씀을 드리겠지만, 어쨌거나 이 디자이너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Ronald Hofstatter, 움라우트가 있으니까 “로날트 호프슈태터”정도로 발음하게 되는 이 사람이 게임의 디자이너 입니다.
생각해보니, 이전에 카드 한글화를 했던 게임 가운데 하나에 이 이름이 적혀있는 것 같아서, 한번 소장 게임들을 뒤져보았습니다. 있더군요. 바로 베네치아라는 게임이….
모임 시작 30분 전부터 매뉴얼을 뒤적거리기 시작했고, 불과 40여분 만에 독어 요약지의 한글화까지 마쳤습니다.
역시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고, 게임을 직접 할 수 있다는 기대감이 많은 일을 하게 만들더군요. 평소라면, 게임 하나 설명서
보고 익히는 것에도 몇 시간이 걸렸을 텐데….
일전에 다이브다이스에서 구매 가격 별 사은품으로 제공된 바 있던
게임입니다. 그 때 저는 놓쳤지만, 그 유통족보(?) 덕분에 비X 스X블님을 통해 싸게 데려올 수 있었습니다. 사은품으로
제공되는 게임이기에, 고작 카드게임 사이즈일 걸로 예상했었는데, 전혀 아니더군요. 퀸의 뚱땡이 라인업 가운데 두 번째로 큰 박스
시리즈입니다. 같은 사이즈로 정크, 왕관과 검 등이 있고, 이글 게임즈의 Age of Mythology와도 같은 사이즈더군요.
영
입하고 오래 지나지 않아 인화지로 한글화를 했을 정도로 정성을 들인 게임이었는데, 붙박이장에서 오랜 숙성을 거쳐 드디어 첫
시연의 기회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게임은 삑사리님 내외와 함께 한 4인 게임이었습니다. 거만이님이요? 글세요. 뭐 어딘가의 버스
안에서 투덜거리며 오고 있었겠지요. 캬하하~
베네치아 게임판과 카드, 그리고 급조한 요약표(^^;)
게임은 르네상스 시대 지중해 교역의 중심도시인 베네치아…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냥 베네치아에서 먹고 사는 비둘기의 삶을 그린 것이지요. 대부분의 대도시들이 그렇듯이 베네치아에도 비둘기가 참 많은
모양입니다. 우리나라도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때 대규모 방사를 한 덕분에 비둘기로 가장한 닭(!)들이 꽤 많은데, 관광수입 꽤
짭짤한 베네치아라고 예외는 아니겠지요. 베네치아를 가본 적이 있는 제 연인이 말하기를 산 마르코 광장에 비둘기 떼들이 꽤 많다고
합니다.
이 게임 역시 비둘기 떼로 유명한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이 중요한 전략적 핵심 지역입니다. 광장을 찾는 관광객들 주변에 잘 달라붙어야 먹이를 많이 먹을 수 있고, 그래야 새끼를 칠 수 있으니까 말이지요.
주
어진 비둘기를 이용해서 가족을 잘 늘려야 하고, 베네치아 곳곳에 잘 뿌려(!) 놔야 일등 비둘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게임의
테마입니다. 물론 현실에서도 비둘기의 왕성한 번식력 덕분에 골머리를 앓기 때문에, 이 게임에서도 비둘기에게 갖가지 시련들이
있습니다. 우선은 비둘기 사냥꾼이 있습니다. 산 마르코 광장에 찾아오는 방문객과 동일한 경로(회전판을 돌려서 들어옴)로
들어오지만, 이들은 비둘기들에게 재앙입니다. 관광객은 전후좌우 대각선까지 비둘기의 번식에 필요한 양분의 축복을 주지만,
사냥꾼들은 전후좌우 대각선까지의 모든 비둘기들을 비둘기의 공동묘지인 산 미켈레(San Michelle)로 보내버리지요.
또한, 한 지역에 비둘기 떼들이 너무 많이 몰려도 베네치아 행정관이 와서 다 쫓아버립니다. 하지만, 이런 시련은 진정한
시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지요. 비둘기들에게 가장 큰 시련은 바로 다른 비둘기들 입니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다른 비둘기에게
앞 뒤로 포위되는 순간, 이 비둘기는 공동묘지에 안치되는 거죠. 이런 비둘기들의 잔인한(?) 습성 때문에 자칫 운에 크게 좌우될
수 있는 게임에 적절한 전략성이 더해지게 됩니다. 산 마르코 광장에 비둘기들이 자리를 잡고, 관광객과 사냥꾼이 들어오면 모든
비둘기들은 한번씩 이동할 기회를 갖게 되는데, 여기서 치열한 자리 경쟁을 통해서 이웃 비둘기들을 공동묘지로 보내야만 하지요.
게임은 전체적으로 엘 그란데의 느낌이 납니다. 액션카드를 통해서 적절한 태클을 넣어줄 수 있고, 엘그란데에서의 카스티요 대신 산 마르코 광장에서의 세력 다툼이 게임의 독특함을 살려주고 있습니다.
규
칙을 읽어보는 것만으로는 꽤 단순한 게임이리라 생각했었는데, 막상 해보니 2시간을 훌쩍 넘기며 치열한 격전의 게임이 되더군요.
게임 초반에는 저와 삑사리님 부인께서 적절한 비둘기 배치로 치고 나가는 듯 했으나, 삑사리님과 제 연인의 [소외지역에서 야금야금
점수 먹기] 비기(秘技) 덕분에 이 둘의 공동 선두로 게임을 끝내게 되었습니다. 도둑새가 홈그라운드에서 시종일관 진을 치고 있던
덕분에 저는 꼴지를 하게 되었지요. 게임의 하이라이트는 관광객에게 올라타며 온갖 아양을 떤 결과 대가족을 거느리게 된
삑사리님이, [가족회합-추방] 콤보로 한 큐에 몰살당한 장면이었습니다. 삑사리님 최대의 위기였지요.
꽤 오래 전에 한글화시킨 게임이지만, 그 동안 제대로 세상구경을 못했던 수도원의 미스터리를 돌렸습니다. 최대 6인까지 참여할 수 있는 게임인데, 첫 게임은 5인으로 돌아갔네요. 추리게임으로 꽤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는 게임이라는데, 이 날은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참가자들을 울고 웃겼습니다.
게임은 수도원의 예배당에서 시작됩니다. 전날 살해 사건의 범인을 잡는 것이 목적이지요. 용의자는 모두 24명.직책, 교파, 후드, 수염, 몸매 등 다섯 가지 특징을 가려내면서 범인이 아닌 사람을 지워나가면 됩니다. 용의자 카드 24장 가운데 단 한장만 게임판 아래에 들어가고, 나머지는 게임 내에서 사용하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clue와 비슷한 시스템이지만, 각종 이벤트 카드와 질문의 상호작용이 꽤 크기 때문에 게임 내내 흥미진진 했습니다. 특히 파이두티 특유의 코믹함이 녹아있는 이벤트에서는 모두가 폭소를 자아냈지요.
[비형 스라블님의 추리 시트지]
전술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뉩니다. 용의자 카드를 많이 확보하거나, 용의자 카드를 일부러 적게 가지고 있음으로 해서, 도서관 같은 곳을 노리는 것이지요. 제 경우는 전자에 해당했습니다. 게임 내내 최다 용의자 카드 보유자였으니까요. 반면에 게임 시작하자마자 여기저기로부터 카드를 빼앗겼던 윤 팀장님의 경우는 후자에 해당되겠지요.
저는 처음에 받았던 카드 가운데 2장을 비교적 오랫동안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용의자 카드를 많이 확보했기 때문에, 예배당에서 미사드릴 때마다 많은 카드를 옆 사람에게 돌려야 할 때도 그 카드들은 꼭 쥐고 있을 수 있었지요. 덕분에 제 손에서 나간 적이 없었던 용의자들은 다른 사람의 추리 시트지에 유력한 용의자로 찍혀 있었습니다. 이것이 이 날의 폭소탄의 빌미가 되었지요.
[제 연인(Twinkrystal)의 추리 시트지]
게임이 진행되면서 추리 시트지의 용의자들 옆에 하나씩 X표가 그려졌습니다. 자신의 손에 들어왔었던 용의자 카드에 의해 체크가 된 것도 있지만, 참가자들이 주고받는 질문에 의해 체크된 것들도 있었지요. 여담이지만, 이 날 게임은 모든 게이머들의 소망이라 할 수 있는 고품격 게임이었습니다. 칼라 시트지를 그대로 사용했거든요. 크하하~
[윤팀장님의 추리 시트지]
점차 용의자들을 줄여나가다 어느덧 한 명의 용의자가 가려졌을 때, 저는 참가자들에게 선언을 했습니다. 나는 범인을 맞췄노라고. 잠시 후 고발장소로 가서 게임을 끝내겠노라고.
이미 대부분의 참가자들은 최후 용의자를 2~3명으로 압축시켜 놓은 상태였기 때문에, 제 선언에 모두들 조바심이 났지요. 그리고 다들 1/2~1/3의 확률에 모든 것을 걸기 위해 고발장소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본인의 추리 시트지]
아쉽게도 보더님이 저보다 한 발 앞서 고발장소에 들어섰습니다. 모두들 반쯤은 체념한 상태였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감을 가지고들 있었습니다. 어쨌든 저를 제외하면 모두 1/2 또는 1/3의 확률이었으니까요.
“범인은…”
(모두들) ‘꿀꺽~’
“XXX입니다!”
순간 다른 모든 참가자들의 얼굴이 환해집니다. 이윽고 터져나오는 웃음 소리.
“와핫핫핫~!”
어리둥절해 하는 보더님을 향해 모두들 마음껏 비웃고 있을 때, 저는 제 손에 든 XXX 용의자 카드를 스윽~ 보여줬습니다. 그제서야 멋적은 표정을 짓지만, 이미 무고한 형제를 고발한 뒤였으니, 그에겐 참회만이 있을 뿐. 예배당으로 가서 팍~ 고꾸라져서 참회기도를 드리게 됩니다.
[보더님의 추리 시트지]
경쟁자의 실패로 게임을 끝낼 찬스를 얻게 된 저는 의기양양하게 고발장소에 들어섰습니다. 그리고….
“범인은…”
(모두들 낙담한 표정이 역력. 하긴 저는 용의자를 1명으로 줄였다고 선언을 한 상태였으니…)
“Basil입니다.”
순간, 다른 참가자들은 조금 전과 같은 반응을 보이며 뒤로 넘어갑니다. 그리고, 보더님의 손에서 나오는 [Basil]카드….
본인 또한 예배당에 엎드려 똑같은 포즈로 참회기도를 드려야만 했지요.
‘이럴 리가 없는데? 모두 표시하고 하나만 표시되지 않은 녀석이 바로 Basil인데! 어떻게 된 일이지?’
그러나, 이는 보더님과 본인에게 그치지 않고, 다른 참가자들도 모두 무고한 동료들을 고발하는 연쇄 고발 사태로 이어집니다. 물론 모든 고발이 허사로 돌아갈 때마다 다른 참가자들의 폭소와 비웃음은 계속되면서 말이지요.
게임 제목처럼 정말로 미궁에 빠져버린 사건. 이후로도 계속 무고한 형제들에 대한 고발은 이어졌고, 무려 7명이나 고발당하게 됩니다. 물론 그 때마다 폭소탄이 터졌고, 차례차례 예배당에 모여서 엎드렸습니다.
결국 최초 고발로부터 무려 한 시간 뒤에야 제 연인에 의해 진범이 밝혀졌습니다. 모두들 게임이 끝나고 나서 난상토론을 벌입니다. 도대체 이 미스터리의 원인이 뭔지 알아야 하니까요. 한참을 토론한 후에 결론이 나왔습니다. 게임 도중 주고받는 질문에 오류가 있었는데, 그 때 모두의 추리 시트지에 진범인 Charles는 X표가 그려진 것이었지요.
결국 후반부에 달해서는 모두가 “Seeing is believing!”을 외치며, 자기가 본 것만 다시 X표를 그리기 시작했지요. 그것으로 모자라서 2~3번씩 확인하는 바람에 모두의 시트지는 걸레가 되어버렸고, 급기야…
“아악~! 나는 내 눈도 못 믿겠어. Seeing is NOT believing. 난 환상을 보고 있나봐~!”
…를 외치는 사람도 나왔죠. (누구냐고요? 쩝~ 접니다. -_-;)
[추리 및 고발, 최종 점수 기록지]
어쨌든 예상치 못했던 에피소드 덕분에 거의 3시간여 동안 쉴 새 없이 웃을 수 있었던 게임입니다. 기회가 되면 또 해보고 싶더군요.
함께 게임에 동참해주신 윤팀장님, 보더님, 비형 스라블님과 제 연인(Twinkrystal)에게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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