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디 예정에 없던 모임이었다. 그리고 모임 개최가 결정된 직후에는 대규모 인원이 모이는 모임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예정에도 없던 대규모 모임은, 단 2명만 찾아온 조촐한 모임이 되어버렸다. 한동안 번잡함에 피로를 호소하던 아내나 본인로서는 어쩌면 더 없이 반가운 상황.
단골 손님인 전심님과 사탕발림님이 찾아와서 오후 2시 경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비교적 심도 있는 게임들로 모임을 가졌다. 4인이서만 할 수 있는 깊은 전략 게임의 향취 속에 빠져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몰입했던 시간들.
(이 날은 본인이 사진을 찍을 틈도 없이 게임에 몰입해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진은 전심님이 촬영한 것으로 대신한다.)
1. 최근 모임에서 절대로 빠지지 않는 단골 게임인 아그리콜라(Agricola). 이 날도 이 게임으로, 어김없이 첫 문을 열어제쳤다.
I덱은 일전에 모임에서 돌려보았고, K덱은 모임에서 돌린 적이 없었던 것 같아서, 색다른 게임을 하기 위해 K덱으로 게임을 진행하였다.
처음부터 유랑극단에 엄청난 매리트를 부여하는 카드들을 두 장이나 깔아두고 게임을 진행하신 사탕발림님의 독주 속에, 전심님은 고소득 부농을 꿈꾸며 야채 농장에 주력을, 크리스탈은 목축업에 전념했고, 본인은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농부가 되었다.
결과는 꾸준히 추가 행동을 챙긴 사탕발림님의 압도적 우위 속에, 적당히 밭이나 갈다가, 남는 목재로 목장이나 키운 본인이 큰 감점 없이 2위를 기록했다. 부농을 꿈꾸던 전심님은 쓸쓸한 빈농의 길을 걸어야만 했고, 농장 하나 없이, 커다란 목장 위에 소 3마리만이 산물의 전부였던 크리스탈 역시 전심님과 대동소이한 빈농의 길을 함께 걸어갔다. (최종 점수: 사탕발림 - 40점, 본인 - 30점, 크리스탈 - 23점, 전심 - 22점)
늘 돌아가는 그 게임. Agricola
2. 이틀 전 처참한 실패의 쓴 잔을 마셨던 Brass가 비교적 빠르게 두 번째 기회를 잡게 되었다. 일전에 본인의 어정쩡한 설명으로 크리스탈에겐 '악몽'이라는 수식어가 붙어야만 했던 게임인데, 이대로 보낼 수는 없다는 오기로 다시금 무대에 등장시킨 것. 하지만, 두 번의 실패는 곧바로 방출이라는 쓰디쓴 고배를 마셔야만 하기 때문에, 설명하는 내내, 그리고 게임이 끝날 때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이틀 전의 게임은 전혀 다른 게임이나 다름 없었다. 여러가지 부분에서 오류가 많았기 때문에 사실상 처음부터 다시 설명해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게임의 규칙서는 여러모로 악명을 떨치고 있었기 때문에, 규칙서만 읽고서 이해하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보통의 규칙서에서는 참조 영역(reference section)은 보충적 역할에 그치기 때문에, 넘어가도 게임에 지장이 없지만, 이 게임의 규칙서에서 참조 영역은 중요 규칙을 모두 포함하고 있다. 앞부분 개관에서는 거의 언급조차 없는 부분이 참조 영역에서 언급되고 있는 터라, 참조 영역까지 꼼꼼하게 숙지해야만 설명이 가능하다.
Brass의 초기 세팅 모습.
어쨌거나, 와신상담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공부해서 나름 완벽하게 소화한 상황이라, 설명에 다들 이해하는 눈치였다.
게임은 산업혁명 전후의 영국 랭커셔 지방을 배경으로 한다. 열심히 공장을 짓고, 운송수단도 마련해서 효율적으로 산업을 발전시키는 사람이 승리하는 게임. 목적이야 간단하지만, 그 과정은 꽤나 골치 아프다.
우선 득점 루트가 제법 다양하다. 면직물의 수출 등으로 돈을 벌거나, 발전하는 도시를 연결하는 운송수단(운하, 철도)를 연결하거나, 랭커셔 지방의 곳곳에서 필요로 하는 석탄이나 철을 생산하거나, 또는 효용가치는 없지만, 고득점 전략인 조선소를 짓는 등, 다양한 득점 루트가 존재한다. 단일 득점 루트의 게임은, 단순한 달리기 경쟁이 되어버리는 반면, 다양한 득점 루트의 게임은 서로 전략을 겨루는 장이 된다는 장점이 있다. 하지만, 적절하게 전략을 수립하지 않으면, 이도 저도 아닌 방황하는 미아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건설할 수 있는 공장들. 왼쪽부터 항구, 방직공장, 탄광, 제철소, 조선소. 운하 시대의 운송수단은 운하이며, 산업혁명 이후 도래하는 철도시대에는 철도가 운송수단이 된다.
이 게임에서는 카드를 사용하지만, 카드의 내용은 공장 건설에만 관여하기 때문에, 그 외의 행동을 할 때 어떤 카드를 버릴 것인지 선택하는 것도 참가자의 몫이다. 게임 진행하면서, '아~ 내가 왜 그 카드를 아까 버렸을까?'라고 속으로 탄식하는 경우도 자주 생기기 때문에, 더더욱 생각해야 할 부분이 많아진다.
뭘 버려야할까?
아울러, 다음 차례가 이전에 얼마나 돈을 썼느냐에 따라 정해지기 때문에, 누군가와의 충돌이 예상된다면, 돈을 쓰는 액수도 염두에 두어야만 한다. 너무 많이 쓰면, 후순위로 밀려버리기 때문에 경쟁자에게 기회를 빼앗길 수도 있다.
직전 라운드에 사용한 금액에 따라 진행 순서를 결정한다.
현실의 지명과 역사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지역 별로 예외적인 상황도 게임에 많이 녹아있다. 예컨대, Birkenhead는 철도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조선소가 들어설 수 없다.
운하시대에는 잠잠하지만, 철도시대에는 태풍의 핵으로 급부상하는 Birkenhead지역.
게임은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운하시대와 철도시대로 나뉜다. 단순히 운송수단의 차이 뿐만 아니라, 산업의 형태마저도 크게 바뀌는데, 각 공장 건설에 소요되는 자원만으로 이를 구현해낸 월러스의 재능에 새삼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운하시대의 모습
특히 운하시대에는 찬밥 신세를 면치 못하던 석탄이, 철도 시대에 오면 품귀현상을 빚는다. 5파운드의 철도를 건설하기 위해, 4~5파운드의 석탄을 구매해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생긴다니. 심지어 게임 후반에는 탄광을 건설하는 즉시 건설 비용을 회수하고도 남았으니, 산업혁명에서 석탄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 새삼 실감케 된다.
철도시대의 모습.
철과는 달리 석탄은 항구와의 연결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항구 도시인 리버풀이나 프레스톤과의 연결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리버풀의 경우, 인접한 위건이 탄광도시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향하는 철도는 선점경쟁이 치열했다.
리버풀로 향하는 철도들. 철도 건설에는 건설 비용 외에 석탄을 1개씩 필요로 한다.
어쨌든 게임의 양상은, 이틀 전의 게임에서 매우 큰 실망을 겪었던 크리스탈이 회심의 조선소 2연타를 통해 36점을 벌어들이면서 역전극을 연출하면서 1등으로 마감을 했다. (102점) 적절한 판매와 유력 도시들의 연결에 집중했던 본인도 무난하게 2등(100점)을 기록했으며, 크리스탈과 조선소 건설 경쟁에서 다소 밀린 사탕발림님과, 기간산업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개인 승점에서는 다소 열악한 환경을 조성하신 전심님이 나란히 공동 3등(89점)을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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