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드 위에 그린 세상 2. 모래시계 편

 

문득 옛 향수에 젖어 에뮬게임을 찾아보았다. 유명한 에뮬레이터 사이트를 찾아 들어갔더니 이름만 대도 알만한, 8~90년대 오락실을 풍미했던 게임들이 즐비하게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것은 역시 슈팅게임이었다.

 

오락실 게임에서 콘솔 게임, 그리고 PC게임에 이르기까지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게임이라면 단연 슈팅게임이다. 비행기 한 대가 종() 스크롤 화면 상에서 쏟아지는 무수한 적들을 상대로 말도 안 되는 폭탄 세례를 퍼붓는 게임. 워낙 많은 슈팅 게임 타이틀들이 범람하다보니, 분명 비행기에 박힌 나사들까지 전부 다 총알로 쓴다고 해도 그만큼 쏟아내지는 못할 비현실적인 설정임에도 불구하고, 1942, 1943과 같은 현실적인 년도수를 제목으로 붙이기도 하고, F-14, F-16은 물론, 미국의 차세대 전투기라는 F-22까지 등장시켜 최대한 현실에 가깝게 보여서 소비자들을 끌어들이려는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일당백(一當百)도 모자라 일당천만 정도는 헤아려야 할 막강한 전투기를 통해, 현실의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날리는 효과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간간히 등장하는 중간보스, 또는 대()보스의 만만치 않은 맷집과 그리고 주인공의 폭탄세례에 버금가는, 아니 다른 적들은 등장해서 한 두 발 쏘고 사라지기에 더욱 깜짝 놀라게 되는 그들의 폭탄 세례에 긴장감 늦추지 않고 스틱을 잡고 있어야 하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필자의 경우는 대부분 세 번 째 보스를 넘기지 못하고 아쉽게 의자에서 일어나야 했지만, 간혹 경지에 오른 오락실의 터줏대감들은 물오른 곡예비행으로 모든 위기를 넘어가는 신기(神技)를 선보였고, 필자는 그 뒤에서 황홀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곤 했다.

 

슈팅게임의 인기가 시들해지면서, 그 자리를 차지한 게임이 바로 격투게임이다. 아직도 많은 코스튬플레이의 대상이 될 정도로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는 격투게임은, 이제 2차원의 평면을 넘어 3차원의 세계로까지 화려한 그래픽을 선보이고 있다. 특히 슈팅게임의 경우, 경지에 오른 사람은 한번의 동전 투입으로 아예 끝까지 앉아있는 경우가 많았지만, 격투게임은 대전(對戰) 형식이기에 한 게임기로 두 사람의 돈을, 빨리는 1~2분 만에 재투입하게 만드는, 오락실 주인에겐 효자게임이었다.

 

그렇다면, 오락실의 효자, 슈팅게임과 격투게임은 어떤 공통점이 있을까? 필자가 생각하기에 게이머의 반사신경을 시험한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날아오는 미사일에 기민하게 대처해야만 살아남는 슈팅게임이나, 상대방의 공격에 재빨리 방어하거나 대응공격을 해야하는 격투게임 모두 뛰어난 반사신경을 소유한 사람에게 유리한 것이니 말이다. 난이도가 높아질수록 더 높은 정도의 위험을, 더 짧은 시간에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주어지는 것인 만큼, 반응 시간의 제한이라는 것은 두 게임에게 있어서 또 다른 필수적인 요소라 하겠다.

 

보드게임의 경우, 이와 같은 기민한 반사신경을 요구하는 게임이 있을까? 물론 있다. 수많은 보드게임 카페의 종(, bell)들을 골로 보냈던 전설의 게임 [할리갈리]가 바로 그 경우이다. 민첩한 손놀림에 너무 무게중심이 치우쳐있다고 판단했는지, 익스트림 버전에서는 종치는 조건을 더욱 까다롭게 만들어버렸다. 오락실과 콘솔 게임으로 반사신경의 굵기를 키워온 사람들에게 아주 적격인 게임이라 생각한다. 종치기라는 유사성을 지닌 게임으로는, 참가자들을 모두 재래상인 판매 홍보원으로 만들어버리는 [피트]가 있다.

 

조금 더 두뇌활동의 영역을 키운 반사능력 테스트 게임으로는 [암스테르담의 상인]이 있다. 역경매라는 특이한 점을 도입한 이 게임은 원하는 가격까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다가 경매시계(Auction Clock)을 눌러야 하는데, 누르기 전까지의 상황은 보통의 경매게임 같지만, 많은 사람들이 순식간에 시계에 달려드는 경우 할리갈리를 방불케 한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게임들은 보드게임에서 비주류이며 극소수에 해당한다. 현실에서도 이런 기민한 반사능력은 특정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그다지 요구되지 않는 바, 현실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보드게임 역시 그다지 많은 반사능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도 시간의 제한은 꽤 많은 부분에 적용된다. 아니, 시간 제한에 받는 영향이 크고 적은 차이가 있을 뿐, 시간 제한이 없는 일은 사실상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시간 제한은 보드게임에서는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그 답이 바로 모래시계이다.

 

모래는 고체적 특성과 액체적 특성을 함께 지니고 있다고 한다. 모래 내부에서는 고체적인 특성을, 모래가 흐르는 표면에서는 액체적인 특성은 지니고 있어, 모래가 많든 적든 일정한 속도로 떨어질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일정한 정도의 시간을 제한하는 데 있어 모래시계는 가장 최적의 선택이라 할 것이다. 모래시계가 그려내는 현실의 시간 제한은 다음과 같다.

 

1.       보드게임에 있어서 모래 시계는 대부분 장고(長考) 방지용이다. 바둑 경기에서 시간 재는 사람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누군가가 하염없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게임이 맥을 잃어버리는 경우, 대부분 모래시계가 등장한다. 루미큐브를 할 때, 숫자조합 생각하기도 바쁜데, 옆에서 모래시계가 하염없이 모래를 떨구고 있는 것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답답해짐을 느낀다. 원고마감시간에 쫓기는 작가나 기자의 경우, 루미큐브를 하고 있으면 비슷한 압박감을 느낄 것이라 생각한다. 이런 게임에서의 모래시계는 이들의 삶을 반영한 것이 아닐는지.

 

2.       모래시계의 또 다른 기능은 승자에 대한 우월적 지위의 보장이다. 특허권이 50년 동안 보장되는 것과 같은 이치. [리코셰 로봇]의 경우, 가장 먼저 해결책을 제시하는 사람이 모래시계를 돌린다. 그 모래시계가 다 떨어질 때까지 다른 사람이 더 좋은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경우, 그가 승리자가 된다. 하지만, 신기술을 내어놓은 기업이 더 나은 신기술을 다른 기업이 발명할까 노심초사하며 더욱 기술 개발에 매진하는 것처럼, 모래시계를 돌린 당사자 역시 보드판에서 눈을 떼고 있을 수는 없다. 모래시계가 보장하는 우월적 지위는 한시적인 것이며, 그 지위를 뺏기지 않으려면 스스로도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는 점은 현실의 그것과 같으니까.


3.       모래시계는 유한(有限)한 인간의 삶을 반영하기도 한다. 모래시계가 게임말인 [탐스크]의 경우,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면, 그 말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는 죽은 말이 된다. 모래시계가 다 떨어지기 전에 얼른 옆으로 옮기면서 돌려놔야 한다. 부지런히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더욱 긴 수명을 보장받는다는 것은 보드게임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의 진리이기도 하다.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침 저녁으로 부지런히 운동하고 있는 어르신들은 이미 탐스크의 진리를 깨달으신 분들이리라.


4.       얼마 전 항공회사 노조가 파업을 선언했다. 노조의 단체행동권은 법률로 보장된 것이며, 사용자와의 협상에 유리한 지위를 차지하기 위한 기술적인 행동이지만, 길어질 경우 여러가지 부정적인 효과를 초래한다. 이에 정부는 일정한 정도의 협상 유예기간을 두어, 만일 그 기간동안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공권력을 투입할 것임을 예고한다. 이러한 종류의 시간제한은 보드게임으로 구현되지 않았을까? [드래곤의 황금]에 사용된 모래시계가 바로 그러한 용도이다. 조금이라도 보물획득에 공헌한 사람은 보물배분을 위한 협상에 참여할 수 있으나, 만일 주어진 시간 동안 협상이 타결되지 않을 경우, 아무도 보물을 가져올 수 없다. 현실과 유일한 차이점은, 현실에서는 제3자가 유예기간동안 당사자의 협상이 타결되기를 바라지만, 게임에서는 결렬되기를 바란다는 점.

 

어쩌면 현실의 시간제한이 지긋지긋한 사람들은, 시간제한이 있는 게임은 피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게임을 통해 현실 교육을 시키고 싶은 부모들이라면, 모래시계가 있는 게임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현실은 날아오는 총탄을 피하는 기민한 반사능력보다는 모래시계의 제한에 대한 적응능력이 훨씬 많이 필요하므로.


(모든 사진들은 다이브다이스의 상품소개 및 에뮬랜드의 화면캡쳐를 이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