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된 책을 다시 해석해야 하는 어려움...

아직 외국어보다는 모국어인 한글이 더 친숙하다고 생각하는데, 이런 글을 읽으면 그런 믿음이 흔들린다.

“내가 하는 말은 모 광고 대리 업체가 대처의 원고를 쓰기 위해서 사회생물학자팀을 고용했다는 것을 암시하든지 어떤 옥스퍼드와 서섹스 대학교수들이 우리에게 그토록 알리려고 노력해왔던 이기적 유전자학의 단순한 진실 실제로 실현된 것을 기뻐하기 시작했다는 뜻이 아니다. 정치적 사건과 유행 이론의 일치는 그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1970년대 말의 우익화를 법과 질서로부터 통화주의로, 그리고 국가주의에 대한 공격으로(보다 자기 모순적 주장) 다룬 역사가 쓰이기 시작할 무렵, 그 다음으로 과학계의 변화가 비록 진화론에서 혈연 선택 모델로의 변화이긴 하지만 19세기의 경쟁적 타인종 혐오에 관한 인간 본성의 개념이 권력을 잡도록 만든 변화된 세상 조류의 일부로 보이게 되었을 것이다.”

이 짧은 문구를 해석하기 위해 수십번을 다시 읽어야만 했지만, 아직도 제대로 이해했다고 확신할 수 없다. 차라리 원문을 읽는 것이 내용을 파악하는데 훨씬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해하는데 걸린 시간도 더 짧았을 것이고.

최근 몇년동안 읽었던 번역 서적의 대부분이, 수준 이하의 번역으로 인해서 중간에 책을 놓아야만 했던 기억을 안겼다. 번역이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번역서를 고를 때는 꽤나 망설여진다.

위의 인용문구는 무려 1976년에 처음 세상에 선보여서, 이 분야에 있어서는 고전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책의 서문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런 책이라면 오랫동안 읽혔을 것이므로, 번역 수준도 그만큼 향상되었을 거라 기대하고 구매했는데, 서문을 채 끝내기도 전에 실망의 바다에 익사하기 직전이다.

한글. 참 아름다운 말이다. 외국어를 배울 때마다 새삼 느끼게 되는 한글의 우수성인데, 이를 더욱 발전시켜야 할 번역자들이 오히려 한글 파괴에 앞장서고 있다는 현실이 매우 슬프다.

판권은 대부분 독점적이라, 독자들은 더 나은 번역서적을 선택할 기회조차 얻을 수 없다. 1년에 채 1권의 책도 읽기 힘든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한국에서, 동일한 원본을 다양한 역자들이 출판할 수 있도록 하자는 제안은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번역 상황이 오히려 한국의 출판시장을 위축시키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건 오직 나 뿐일까? 그나마 책을 읽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이들조차 차라리 원서를 읽고 말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드는 상황이라면 어떤 방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하지 않을까?

기회가 된다면, 한국의 번역서들이 얼마나 원서의 이해를 방해하고 있는지, 저자들에게 설명을 해주고 싶다.

차라리 아니함만 못하다는 말. 수준 이하의 번역을 양산하고 있는 번역 주체들에게 해주고 싶다. 어쩌면, 실제로 그렇게 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번역서적의 빈곤함을 독자와 출판시장의 책임으로 넘기고 싶겠지만, 번역 주체들에게도 절대 작지 않은 책임이 지워져 있음을 인식하길 바란다.

p.s. 이글을 쓰는데 걸린 시간이, 몇 페이지에 불과한 서문을 읽는데 걸린 시간보다 훨씬 짧았다. 책값보다도, 저자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불필요하게 소모된 나의 시간이 더 아깝게 느껴진다. 앞으로는 책을 읽으면서 역자를 미워하게 되는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래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