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제목 참 길기도 하다. 작년, 아니 재작년 동계 올림픽 때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피겨 스케이팅. 나름 권위 있는 4대륙 대회가 한국에서 열렸다. 이번이 무려 세 번째라는데, 앞선 두번은 아예 피겨에 대해서 몰랐던 시기에 있었던 거라 좀 아쉽다. 그 당시에는 입장료가 무료였었다는데...
이번에 연아의 불참으로 인해서 많이 김이 샜다고 하지만, 높은 입장료 가격만으로 볼 때는 나름 장사를 한 게 아닌가 싶다. 너무 높은 가격과 조기 매진으로 인해 결국 이번 대회의 전 경기를 TV로 밖에 볼 수 없었다. 하긴 직접 아이스링크에서 본 건 재작년의 Superstars on the ice 때 뿐이지만... (작년의 그 행사는 목동 지붕에서 방수작업을 하며 담배를 피우신 아저씨의 멋진 방화쇼로 취소되어버렸다. 다시 생각하니 열이 뻗쳐 오른다.)
대회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기량을 체크할 정도의 눈썰미는 갖지 못했으니 다른 건 생략하고, 갈라쇼의 소감만 말하고자 한다. (본문에 삽입된 영상의 출처는 모두 SBS이다.)
1. 여자 싱글에서 요즘 본인이 주목하고 있는 선수는 안도 미키이다. 아사다 마오보다 3살 연상인지라, 먼저 얼굴을 알렸을 텐데, 내가 피겨를 보기 시작한 때에는 항상 2인자였다. 그래서인지 항상 티없이 맑은 얼굴의 마오와는 달리, 얼굴에서 약간의 그늘 같은 게 보인다고나 할까. 특히 이번 4대륙에서 완전히 야윈 얼굴로 나와서 그게 좀 두드러져 보였나보다.
성격으로 봐서 2인자에 그냥 만족하고 있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올해 점프의 채점 강화가 예고되었을 때, 안도는 플립 점프의 약점을 개선하기 위해 시즌 전에 꽤 고생을 했다고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백지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그려진 그림을 고치는 작업이 훨씬 고되고 힘들다. 미키 역시 플립 점프를 수정하는 과정에서 꽤나 고생을 했다. 오히려 장기였던 러츠가 말썽을 피우기도 하고 부상까지 당하기도 했다.
이러한 소식들을 접하면서 왠지 그녀를 응원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겨우 3살 차이에 불과하지만, 마오는 소녀의 느낌인데 반해, 미키는 여인의 느낌인 것도 한 몫 했다.
쇼트에서 마오와 1점 차이도 나지 않는 점수로 2위를 차지하는 걸 보고, 가슴 졸이는 마음으로 프리를 지켜봤는데, 결국 아쉽게도 미키는 자폭으로 3위가 되어버렸다. 쿼드러플을 시도하려 했었다는데, 역시 부담이 되었던 것일까?
하지만, 갈라에서 그녀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파격적인 의상과 풀어서 늘어뜨린 긴 머리. 그리고 무엇보다 비장미를 떨치고 환하게 웃으면서 연기를 펼치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조금만 살이 붙었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야윈 건 아직 마음에 걸리지만,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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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연아 덕분에 여자 싱글만 줄창 보아왔던 지난 시간들에 비해, 그래도 이번에는 다른 종목도 볼 수 있는 기회가 좀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SBS가 남자 싱글들을 비롯해서 무지막지하게 잘라먹으며 중계하긴 했지만, 그래도 과거에 비하면 엄청나게 좋아진 환경이었다. 이번에 특히 내 눈을 즐겁게 한 종목은 아이스 댄싱이었다. 처음 화면에 등장했던 조의 연기도 환상적이었는데, 뒤로 갈 수록 실력이 출중해지는 터라, 거의 넋을 놓고 보게 된 종목이다. (시골 총각 서울 상경해서 고층 빌딩 쳐다보는 느낌)
그 가운데서 단연 압권은 테사 버튜와 스캇 모이어의 조. 현재 18살과 20살의 젊은 남녀 한 쌍인데, 이 들은 무려 11년 동안이나 한 조를 이루었다고 한다. 10살도 채 되기 전에 파트너가 된 셈이다. 게다가 어느 한 쪽이 좀 못 생겼다면, 상대방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 남녀는 둘 다 모두 미모가 출중하다. 시샘이나 투기가 아닌 감탄부터 나오는 한 쌍이랄까.
다른 조와는 달리 프리에서 아주 수수한 의상으로 등장하길래, '재들은 의상이 그냥 평상복 같네.'라며 생각하며 봤는데, '의상 따위로 점수를 벌 필요까지 있겠냐?'라고 묻는 듯한 그들의 연기에 완전히 넋이 나갔었다.
이 날 갈라에서는 프리보다는 조금 신경을 쓴(?) 듯한 의상으로 빙판위에 입장했고, 예의 그 환상적인 연기로 내 넋을 또 한번 빼앗았다. 혼자서 펼치는 고난이도 연기도 멋지지만, 둘이서 완벽하게 혼연일체가 되어서 뿜어져 나오는 그 휘광이 얼마나 멋진지 새삼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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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자 싱글은 SBS가 송두리째 잘라먹은 부분이다. (페어 프리 생중계 때 뒤에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 녹화한 부분을 붙여서 보여주었다. 나중에 확인!)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세계 신기록이 수립된 순간의 연기를 잠깐 정빙시간에 보내주었다. 다카하시 다이스케이다.
이 친구의 첫 인상은 그리 좋지 않았다. 전형적인 일본 불량학생 같은 마스크에, 기괴한 느낌까지 주는 갈라 연기까지... 아내와 나는 그가 화면에 나올 때 마다, "쟤 왜 저러냐?"라는 눈길로 쳐다보곤 했었는데, 이번 프리 프로그램을 보곤 완전히 생각이 바뀌어버렸다. 정말 정열적이고 힘이 넘치는 한 청년의 폭발적인 연기를 보게 된 것이다. 사람들 말로는 쇼트 프로그램이 더욱 압권이었다고 하는데, 이거 죄다 잘라먹은 SBS가 무척 원망스러운 순간이었다. 프리 점수만으로 175점을 넘기며(어지간한 여자 선수 SP+LP 합계 점수!!), 합계 264.41을 기록했다. 이거 세계 신기록이란다.
암튼 기존의 첫 인상을 완전히 바꾸어버린 계기를 만든 다카하시는, 문제의 갈라에서는 기존의 그로테스크한 마임을 많이 억제함으로써 한결 나아진 인상을 심어주었다. 그리고 앙코르로 보여준 SP의 일부는 그가 음악을 온 몸으로 느낀다는 걸 알게 해주었다. 연아가 탱고 연기 때 보여준 것과 비슷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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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지막 피날레는 정말 흥미진진했다. 이번 대회 상위 입상자 전원이 빙판에서 거의 무도회 쌍쌍파티를 연상케 하는 분위기를 연출했는데, 박진영의 Honey에 맞춰서 어설프지만, 박진영의 춤을 흉내내는 스케이터들의 모습에 그 자리에 있던 관객들도 뒤집어졌지만, 화면으로 보던 나 역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특히 마오가 팔짱낀 도도한 모습을 하다가 손을 살짝 뻗으며 전진하는 모습! 본래 도도해야 할 표정인데, 마오가 그런 표정을 할 수 있을리가 없다! 너무나 귀여운 표정과 도도한 몸짓의 부자연스러움이, 순간 내 눈을 하트로 바꿔버렸다. 어쩌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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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연아 양이 참석하지 못해서 많이 아쉬웠지만, 어차피 현장에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4대륙 대회나, 세계 선수권 대회나 내겐 별반 차이가 없다. 빨리 완쾌해서 멋진 모습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1등 안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있어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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