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오전이 되어서 잠에서 깨어난 우리는, 가벼운, 그러나 아내가 정성껏 준비한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아내가 식사를 준비하는 동안 MANN님으로부터 한니발:로마 vs. 카르타고의 설명을 들었는데, 너무 매력적인 게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게임이 그렇지만, 특히 역사를 테마로 하는 전쟁 게임의 경우, 많고 적고의 차이는 있지만 추상화의 단계를 거치게 되는데, 추상화가 많이 진행될 수록 테마는 옅어지는 대신 시스템의 균형을 살릴 수 있는 여지가 많아지고(예: 바둑, 장기), 반면 추상화가 적게 진행될 수록 테마는 진하게 반영되겠지만, 균형잡힌 시스템을 구현하기 힘들어진다. 사실 전쟁이라는 것이 균형잡힌 양자간에 진행된 적이 거의 없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를 테마로 한 게임에서 결론까지 역사적 결과와 동일하게 만든다면, 누가 게임을 하려 들겠는가? 어쨌든 간에 테마와 시스템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것은 언제나 게임 디자이너에게 큰 숙제건만, 이 게임은 그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단지 설명만 들은 시점에서 조금 성급한 감은 있지만, 게임에는 역사적 사실이 비교적 듬뿍 담겨있다. 로마와 카르타고의 장수들의 특수 능력, 지형과 부족의 특징, 그리고 시대적 흐름에 따른 특수성(아프리카누스의 등장 같은..) 등이 게임의 사실성을 충분히 살려준다. 게다가 로마와 카르타고가 비교적 팽팽한 상황전개를 보인다는 점에서 시스템의 균형 역시 잘 잡힌 듯 하다. 한동안 로마사에 몰입했던 나로서는 충분히 흥분할만한 게임이다. 하지만, 훗날을 기약하며 일단 2인 게임인 한니발: 로마 vs. 카르타고는 접어야 했다.

3인 게임은 은근히 게임을 고르기 애매하다. 아내는 ALEA의 명작들, 특히 플로렌스의 제후를 간절히 원했지만, 3인 게임은 2인 게임만도 못하다는 세간의 평 때문에 채택되지 못했다.

전날 손님방, 즉 게임이 잔뜩 진열된 방에서 잠을 청한 MANN님은 사실 늦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인 즉, 평소 궁금했던 게임들의 규칙서를 읽어보고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는데, 그 덕분에 배우게 된 게임이 하나 있다. 바로 로마제국을 기독교 제국으로 만든 유스티아누스 황제에서 이름을 딴 레오 콜로비니의 [Justinian]이 그것인데, 사실 테마와는 크게 상관없는 줄서기 게임이다. 아마도 로마의 역대 황제들과는 달리 동양의 절대 군주와 많은 부분에서 닮았다는 유스티아누스의 이미지만 차용한 듯 싶다. 말하자면 길어지지만, 결론적으로 유스티아누스 황제에게 누가 더 강한 연줄을 대느냐 하는 것이 게임의 목적이다.

하지만, 이 게임은 3인 게임이 너무 심심하다. 3명 가운데 1~2명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면, 나머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세력 관계의 판도를 뒤집을 수가 없다. 게임 인원이 3~4인 전용이라고는 하지만, 4인 게임에서도 크게 나아질 것 같지는 않다. 적어도 5~6인은 되어야 좀 활발한 세력 이동이 생기지 않을까? 어쨌거나 세력 이동이 활발하지 않은 상태라면, 처음에 뽑아온 카드의 운이 클 것이고, 그 다음으로는 세력 판도 변경 결정시기를 정하는 사람이 중요해지므로, 더더욱 세력 이동은 경직될 것이다. 어쨌거나 3인 게임으로서의 이 게임의 가치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MANN님이 독어 독해 능력이 출중한 덕분에 생각치도 않은 게임을 배웠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겠지만, 다시금 한번 살펴봐야 할 정도로 좀 헛점이 보이는 게임이었다. 레오 콜로비니와 팔랑스의 화려한 구성물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첫 인상이었으니 말이다.

뭔가 게임을 더 한 것 같은데, 기억 나는 건 이 정도다. MANN님의 여자친구인 뮤님의 호출로 MANN님이 급히 복귀를 하면서 이 날의 모임은 끝이 났다. 이 때가 대략 오후 5시 경.

내일 미국 대사관에 가야 하는데, 대사관에는 주차시설이 없다고 한다. 광화문 일대에서 주차하기가 그리 녹록치 않을테고, 인근 종로 구청이나, 세종 문화회관도 살인적인 주차요금을 받는 곳들. 한참 인터넷으로 주차 가능 시설을 뒤져본 결과 그냥 대중교통을 이용해야겠다는 결론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