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3일, 월요일에 전화를 한 통 받았습니다. 초야에 은거하는 백면서생이라 찾아주는 이도 없기에, 덩달아 제 전화기도 캔디(외로워도~ 슬퍼도~)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데, 왠 낯선 번호가 뜨더군요. 의아한 마음으로 시작했던 한 통의 전화. 그 전화로 인해 즐거운 인연이 하나 더 늘었습니다.

다이브다이스에서 눈팅을 주로 하신다는 그 분은 통화 내내 정중하고, 교양있는 태도를 보여주셨습니다. 그로 인해 춘추가 제법 되실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한참 인생 선배셨습니다.

통화 내용은 간단했지만, 저로서는 당황스러운 내용이었습니다. 내용의 골자는 “당신을 꼭 한번 만나보고 싶소~.”였으니까요.

연애도 저돌적으로 해왔던 터라, 여성에게도 자주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하기는 많이 했지요. ^^; 하지만, 중년 남성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 나니 당황스러울 수 밖에요.

어 쨌거나 우여곡절 끝에 18일 토요일에 깜짝 아지트 번개 모임을 갖게 되었습니다. 변덕스러운 저희 커플의 일정 덕분에 모임은 당일날까지 불투명했고, 결국 단촐하게 제 친구 커플을 포함한 5명이서 모이게 되었습니다.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지만, 제 연인의 기분이 들쭉날쭉이라 정기적인 모임을 갖는 것이 쉽지 않더군요. 쩝쩝~)

처음 뵌 분이시지만, 전화로 받은 인상 그대로시더군요. 다만, 호기심이 남다르셨습니다. 저 역시 호기심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라, 만나서 대화를 나눈지 몇 분 지나지 않아 서로 친해진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호기심 못지 않게 열정도 넘치는 분이셨습니다. 제겐 낯 간지러운 이야기라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하겠습니다만, 마치 스타에게 10대 소녀 팬이 품고 있음직한 열정을 중년까지도 간직하시고 계시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 부러웠습니다.

쑥스러움을 누르고,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주로 보드게임과 더불어 마주 앉은 사람들에 대한 것이 화두였지요.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보드게임이라는 유희문화를 향유하는 이들의 공통된 갈증은, 바로 함께 누릴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저도 그렇고, 보드게임을 매개로 연을 맺은 이들에게서 한가지로 느껴지는 것이니까요. 그 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게임에 대한 갈증과, 이를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은 열망이 대단하셨습니다. 어쩌면 월요일의 전화 통화도 그 연장선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다만, 의아한 점은 저 같은 초보 게이머가 선택(?)된 점입니다. 게임에 대한 열정이라면, 절대로 뒤지지 않을 다이브다이스의 회원들이 즐비한데 말이지요. 어쩌면 저를 계기로 그런 분들을 만나고 싶으셨을 겁니다. 서울의 동부지역(상일동, 하남, 구리, 광주 등)에 의외로 보드게이머가 많은데, 때가 되면 정기적인 모임을 주관해봐야겠습니다.

각설탕 하나 먹고, 이날의 첫 게임으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를 선택했습니다.

이 게임은 묘하게 제게 3인 게임으로 남아있습니다. 2~4인까지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평가가 3인일 때 가장 좋은 이유 때문일까요? 아직 2인, 4인 게임으로는 해보지 못하고 오직 3인 게임으로만 돌렸네요. 이 날 역시 아직 친구커플이 도착하지 않은 관계로, 3인 게임이었습니다.

그 분(다이브다이스의 대화명을 빌어 이하 “차님”이라 호칭)은 처음 접하는 게임이라시기에 간단히 설명을 하고, 게임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이 게임을 처음 할 때 겪는 어려움, 즉, 외부 분쟁과 내부 분쟁을 헷갈려 하시더군요. 덕분에 게임 초반부터 분쟁이 빈번하게 발생했습니다. 저와 제 연인은 두 분쟁의 차이를 알려드리기 위해, 그리고 차님은 이를 이해하기 위해, 한마디로 분쟁 러쉬였습니다. 세 진영의 각 지도자들은, 설사 환자 화장실 들락거리듯, 보드 판을 들락거려야 했고, 영토를 키워나갈 틈도 없이 숱한 타일들이 분쟁 해결을 위해 쓰여졌습니다. 게임 종료 조건이 2가지가 있는데, 보통 거대 국가 탄생(게임 내 유물 잔존 개수 조건)으로 끝이 났던 이 게임이, 타일이 바닥나서 끝나더군요. 아직 유물이 많이 남았었는데…. 조용히 키워 먹는 건 저나, 제 연인이나 성미에 맞지 않는 일이기도 했지만, 초반부터 분쟁러쉬가 계속되다 보니, 사실상 전쟁게임이 되더군요. 제가 제 연인을 1점차로 제치고 1등. 차님은 한 종류의 타일을 전혀 모으지 못하시는 바람에, 유물만으로 3점. 뭐 첫 게임은 아픔으로 배우시는 거니까.... 핫핫~ (애써 [설명하고 1등 하기]였다는 것을 감추려는 웃음)

게임 끝나니까 배가 고파서 음식을 주문했는데, 시간 개념을 안드로메다로 관광 보낸 제 친구가 아직도 도착을 안 했었습니다. 그래서, 잠깐 맛보기로 6Nimmt!를 한 라운드만 돌려보았습니다. 친구가 오면 황소 뿔의 춤 5인 게임으로 돌리기 위한 전초 작업이었지요.

9시가 훨씬 넘어 도착한 친구 커플과 함께 우선 식사를 했습니다. 비X XXX님이 특히 좋아하시는 돈까스였지요. 핫핫~ 식사도 하고, 차도 한 잔씩 하면서 잠깐 이야기 꽃을 피웠습니다.

5인 멤버를 갖추었기에 바로 전에 연습했던 6Nimmt!의 보드게임 버전인 황소 뿔의 춤을 꺼내 들었습니다. 기본적인 메커니즘은 같지만, 다양한 요소들을 추가함으로써, 재미를 배가시킨 게임이지요.

차 님의 초반 독주가 두드러졌습니다. 알다시피 이 게임은 점수 트랙에서 독주한다는 의미가 꼴찌를 의미하지요. 하지만, 뭐든 앞서나가면 좋은 걸로 교육받은 우리네 교육문화 속에서 이 게임은 꼴찌를 하면서도 즐거움을 주는 게임이기도 합니다. 저 역시 이 게임에서 숱한 꼴찌를 했지만, 끝나고 나서도 독주했다는 묘한 뿌듯함을 느꼈…. 쿨럭~

저는 운이 너무 잘 따라줘서 10점을 채 못 나갔습니다. 게다가 해피 카우로 뒷걸음질까지 하는 바람에 나머지 4분과 너무 동떨어졌습니다. 완전 순위권 제외! (다른 말로 1등 예약. 이 게임도 설명 담당이었는데… --;;;;)

초 반은 차님의 독주와 친구 연인의 견제(?), 중위권의 제 연인, 좀체 움직이지 않는 저와 제 친구의 형국이었는데, 중반 이후, 친구 커플이 동반 질주를 시작하더군요. 한 칸 차이로 바싹 추격한 친구 연인, 그리고 5칸 내외로 거리를 두고 추격전을 펼치는 제 친구. 이들의 치열한 레이스(?)덕분에 저희 커플은 왠지 도토리 신세가 된 듯한….

마지막 라운드는 누가 벌점을 먹느냐에 따라 1등이 가려지는 안개 정국으로 펼쳐집니다. 결국 막판에 황소똥(최종 점수칸)에 박힌 건 친구 연인이었습니다. 원래 여기서 게임이 끝나야 하지만, 그 라운드에 공개된 타일들은 모두 배치했습니다. 그랬더니 제 친구는 아예 추월해버린 거 아니겠습니까? 헐~ 결국 초반 독주하셨던 차님은, 친구 커플에게 모두 추월 당해서 3등으로 마감하셨습니다. 저와 제 연인이 나란히 1, 2등.

이 게임에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습니다. 게임 종료조건이 2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점수조건이고, 하나는 타일 고갈입니다. 중간까지 진행되는 모습을 보니, 대충 타일로 끝이 날 것 같더군요. 타일 고갈 속도가 꽤 빨랐으니까요. 하지만, 결국 게임은 점수로 끝이 났지요. 그 이유가…?

친구 연인이 버려야 하는 타일들을 다시 타일 바구니에 넣고 있었던 겁니다. -_-; 중간에 이렇게 묻더군요.

“어? 저기 게임 박스에 버려진 타일들은 뭐야?”
(일동) “…….”

그녀는 타일을 버린다는 것은 의당 타일 바구니에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지요. 덕분에 게임이 never ending story가 될 뻔 했었답니다.

이어진 게임은 보난자였습니다. 아무래도 게임에 익숙치 않은 친구 커플을 상대로 하려다보니, 전략게임은 내어놓기가 어렵더군요. 보난자도 높은 게임성을 가진 게임인데, 평소 돌려보기 힘들었던 터라 오히려 반갑긴 했습니다.

이 게임에서 차님의 진가가 발휘되더군요. 인생의 연륜과 재치가 듬뿍 묻어나는 협상 스킬. 이경규씨가 “인생은 로비야~!”라고 말을 했는데, 역시 인생 경험이 풍부하신 분의 협상은 뭐가 달라도 달랐습니다. 여기저기 박장대소(拍掌大笑)가 터졌습니다. 중간중간 1등 견제를 위해 게임을 조율하신 차님 덕분에 모두 1점차로 옹기종기 게임을 마쳤습니다. (또 제가 1등… -_-;;;)

친구 커플은 집으로 돌아가고, 다시 3인 게임의 시간이 돌아왔습니다. 차님이 토레스를 원하셔서 신판 토레스를 꺼냈습니다. 차님은 구판으로 소유하고 계시다더군요. 그러고보니, “신판 토레스의 성으로는 몇 층까지 쌓아봤어요?”라는 생뚱맞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8층까지 올려봤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더니, “게임에서 말고, 그냥 쌓는거요. 저는 80여 개를 넘어가니까 중심이 안 잡히더군요.” -_-; 저도 아직 그건 해보지 않았는데, 나중에 한번 해봐야겠어요. 보드게임 규칙서에 안나오는 새로운 게임이 하나 나올 것 같지요?

이번 3인 토레스는 아주 색다른 느낌이었습니다. 제가 해본 토레스는, 주로 연인과의 2인 게임이었고, 3인 토레스는 지난 번 비X XXX님과의 게임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였는데, X형 XXX님의 경우 그 게임이 첫 게임이었기 때문에, 사실상 테스트 플레이의 성격이 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XX 스XX님께 그날 졌단 말이죠. 허억~) 그런데 차님은 부인되시는 분과 자주 돌리셨다고 하시더군요. 다시 말해 저로서는 베테랑과 진행하는 첫 토레스 게임이었던 겁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주 현란한 플레이가 펼쳐지더군요. 제가 토레스를 하면서 “이거 참 조잔한 게임이다.”라는 말을 했었거든요. 이유인 즉, 자기가 열심히 쌓은 성에는 남이 들어가지 못하게 방해를 해야 하고, 남이 쌓아놓은 성에는 열심히 무임승차를 하기 위해 발버둥을 쳐야하는 게임이기 때문이지요. 바로 그 플레이를 아주 현란하게 하신 분이 바로 차님이셨습니다. 제가 기반을 닦은 성에 무임승차를 하신 것도 모자라서, 제가 더 이상 층수를 못 올리게 막아버리시더군요. 물론 본인은 왕창 키우고 말이지요. 첫 라운드에 그렇게 당하고 나니까 정신이 번쩍 들더군요. ‘아~ 이게 바로 토레스의 정수구나. 사람들이 왜 이 게임에 환장을 하는지 알겠다.’ 이후부터는 내가 점수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상대가 점수를 못 먹게 방해하는 것에도 많은 신경을 쓰게 되었습니다. 이전까지 저와 제 연인은 서로가 태클 플레이어라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차님의 플레이에 비하면, 요조숙녀 플레이였던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2라운드에서 제가 선두를 치고 나갔습니다. 치고 나갔다는 표현도 우습네요. 2라운드 점수 계산했을 때는 차님과 2점 차이 밖에 안 났으니까 말이지요. 파워그리드만큼은 아니지만, 토레스에서 먼저 차례를 가지는 것은 그리 유리하지 않습니다. 뒤집힐 것이 뻔히 예상되는 상황에서 계속 박빙의 선두를 유지할 때는 더더욱 그렇지요. 제 연인은 1~2라운드 점수 계산할 당시, 멀찌감치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사실상의 2파전이었습니다. 아니 2파전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성을 높이는데 주력했고, 차님은 마스터카드의 보너스 점수에 주력했습니다. 마스터카드의 보너스 조건이 모든 기사들이 서로 인접해 있는 경우 40점을 주는 것이었기 때문에, 차님의 모든 기사들은 한 곳에 옹기종기 모이고 있었지요. 게다가 왕이 주는 보너스까지 차곡차곡 챙기셔서, 3라운드 점수 계산했을 때, 결국 저를 1점차로 제쳤습니다. 7층짜리 성으로 달아나려고 했지만, 왕 보너스를 챙길 수 없었던 것이 치명타였지요. 그런데 1등은 제 연인이 차지했습니다. (허걱~!) 왕 보너스를 챙겼고, 제가 높여놓은 성에 무임승차를 했고, 그 성의 바닥면적을 넓히면서 여러 성에서 점수를 획득하는 작전으로 나갔던 것이지요. 처음 이 작전에 최대 수혜자가 제가 될 것이라 생각해서, 차님은, 이 게임을 제가 이길 경우 부부사기단의 업적일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전혀 의외의 상대가 1등을 차지했습니다. 졸지에 저는 꼴찌가 되었네요.

최종 점수! 검은 색에 본인... -_-;

자신이 1등임을 알리는 저 거만한 손가락~!

다시금 느끼지만, 걸작입니다. 게임을 할 때마다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네요. 일전에 이 게임에 대한 평가를 내렸던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지더군요. 아직 이 게임의 정수를 다 맛보지 못한 것 같아서 말이죠.

이어진 게임은 알함브라였 습니다. 게임 구매 러쉬 초기에 들어왔던 녀석이라 꽤 자주 돌렸었는데, 한동안 못 찾았던 녀석이지요. 본판이 모두에게 익숙한 게임이라 확장 1번 가운데 [고관의 부탁]을 넣어서 진행했습니다. 결과론이지만, [고관의 부탁]은 인원이 많을 때 더 빛을 발했을 것 같네요.

저희 커플은 주로 2인 게임을 많이 해왔었기 때문에 어지간하면 타일에 금액을 정확히 맞추어서 지불하려고 합니다. 원하는 타일을 무리해서 구매해야 할 필요성이 많이 떨어지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카드 장전에 주력하는 스타일인데, 차님은 외벽 중시 스타일이더군요. 필요한 외벽이다 싶으면, 많은 비용을 들여서라도 구매해오곤 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있더군요. 외벽 점수는 가장 긴 사람만 차지하게 된다고 알고 계셨던 겁니다. 에러였던 것이지요. 여담이지만, 차님의 자택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들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만 정식 규칙보다 훨씬 빡빡한 에러로 진행하는 줄 알았었는데, 차님의 집에서는 훨씬 더 각박(!)한 하우스룰이 적용되고 있더군요.
어쨌거나 덕분에 첫 번째 점수계산에서는 두각을 나타내셨었는데, 총알 소진이 심한 탓에, 중반 이후 조금씩 밀리고 계셨습니다. 제 경우는 외벽도 꽤 길게 만들었지만, 고급 건물에 주력했습니다. 탑이나 정원 같이 높은 점수를 주는 타일을 모으고 있었지요. 덕분에 같은 타일에 주력하던 제 연인이 불판 위의 오징어처럼 말렸습니다. 최종 순위는 저-차님-제 연인.

알함브라를 끝내고 나니까 시간이 4시 정도 되었습니다. 게임을 더 하고 싶었는데, 차님이 지금 안 가시면 졸음운전의 위험이 있으시다면서 모임을 끝냈습니다.

모 임이라고 해봐야, 번개 형식이었기 때문에, 조촐한 3인 게임 위주로 돌아갔지만, 새로이 열정적인 분을 알게 되어서 흐뭇한 시간이었습니다. 이제 제가 “그 분”을 잘 설득해서 가급적이면 정기적으로 모임을 가질 수 있도록 해보려 합니다. 이렇게 게임을 사이에 놓고 사람과 마주 앉는 시간이 너무 즐거우니까 말이죠.

p.s. 경황이 없어서 사진은 또 토레스밖에 못 찍었네요. 아니면 토레스가 끝났을 때 가장 예쁘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핫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