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 Tom Vasel과 만나기로 약속했던 날이라, 점심 먹고 의정부로 출발을 했다. Tom과의 만남에는 여기저기 얽힌 일화가 좀 있다. 우선, 지난번 What's it to Ya의 공동구매 때문에 메일을 주고받게 된 Mike Petty의 소개로 Tom이 먼저 전자우편을 보내왔다. 이후로 일정을 잡으려고 할 때마다 조금씩 어긋나서 거의 석 달동안 만나지 못했는데, 다시 Mike가 메일을 보내왔다. 내용인 즉, "너희, 아직도 안 만났냐?" 였다. 결국 나와 Tom의 만남이 국제적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 같아서 전화를 걸어서 약속을 잡았다.

물론 혼자보다는 여럿이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주변의 보드게임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신청자를 모집했건만 역시나 불발탄. 아니 신청자는 있었지만, 이날 오전, 정확히는 12시가 다 되어서야 불발탄으로 판명이 났다. 수원에서부터 불참하는 아빠들을 대신해서 아기 엄마들을 모시고 우리 집으로 올 계획이던 리키마틴님이 아내의 급전을 받고 불발탄을 날렸던 것이다. 사실 이 내용을 이날 오전에 메신저를 통해 민샤님께 전달 받았고, 이후 나와 아내는 의정부로 출발한 것이었는데, 돌아와보니 상당한 오해가 누적되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런 종류의 오해에 몇 달동안 시달려온 나로서는 앞뒤 안 가리고 모든 채널을 닫아버리고 싶은 충동까지 느꼈지만, 그래서는 안될 것 같아 정중한 해명글을 올렸다. 시간이 흐를 수록 인간관계에 대해서 점차 자신이 없어지는 걸 느낀다. 정말 칩거에 들어가야할 것 같다.

어쨌든, 의정부까지 가서 Tom과 처음으로 만났다. 그는 큰 키에 상당한 덩치의 소유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예의 바르고 정중했다. 게다가 다섯 딸의 아버지였다. 집은 거의 촌구석에 있었고, 아주 좋은 집도 아니었지만, 넓이만큼은 상당했다. 게임 보관과 아이들 양육이라는 조건에는 적당한 조건이랄까. 나중에 알게된 사실이지만, Tom은 나와 같은 나이였다. 나보다 불과 2개월 정도 생일이 빠르다고 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다섯 아이의 아버지가 되었느냐고 묻자, 나더러 서두르는 것이 좋을 거라고 말했다. (음? 뭘?)

예상대로 엄청난 소장품, 그리고 학교 사무실에도 만만치 않은 소장품들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상당수의 게임들은 리뷰를 부탁하는 제작자들 덕분에 무료로 공급받는다고 했다. 하긴 그는 개인의 홈페이지 뿐만 아니라 보드게임긱, Funagaindice tower라는 인터넷 방송까지, 보드게임 분석가로서 상당히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으니, 그정도 특전(?)은 누릴만 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그의 소장품 구경에 정신이 팔린 동안, 아내는 Tom의 아이들에게 완전히 포위되었다. 한국 아이들이라면 으례히 할 것 같은 낯가림도 이 아이들에겐 전혀 관계없는 이야기 같다. 우스개지만, 아이들이 아내보다 영어를 더 잘하는 것 같다.

가볍게 한 게임을 하기로 해서, Power Grid를 선택했다. 이번에 출시된 새로운 발전소 카드덱을 사용하기로 했다. Tom에 말에 따르면 발전소가 좀 더 강력해졌고, 확장 게임을 위한 발전소도 추가되었다고 한다. Tom과 그의 아내, 그리고 우리 부부 내외까지 4인 게임으로 진행했는데, 아무래도 아이들 때문에 신경이 분산되는 것 같아서, 내가 좀 서둘러서 종료조건을 만들어버렸다. 내가 다음 라운드 발전에 필요한 자원까지 모두 사놓은 상황인지라 전혀 예상을 못했기 때문이겠지만, Tom이 적잖게 당황하는 기색이다. 하긴 그는 내 덕분에 그 게임에서 꼴지가 되어버렸다. 본인은 3등이었고, 아내가 1등을 차지했다. 젖먹이 아이를 안고 고군분투했던 Tom의 아내는 2등을 차지했다.

피자로 저녁식사를 해결한 우리는, 아이들이 제법 큰데도, 게임에서는 소외시키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 애들도 할 수 있는 게임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Tom이 보관장에서 애들용 게임을 몇 개 집어왔는데, 게임 자체는 그다지 흥미로울 것이 없는 것들이지만, 아이들이 즐거워 하는 걸 보니 우리도 즐겁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런데, 다섯 아이의 아버지인 Tom은 왠지 좀 아이들이 성가신가보다. 흘흘~ 하긴 나 같아도 매일 다섯 자매들에게 시달린다면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게임을 마치자, 아이들이 갑자기 일제히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후 모두가 잠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아내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운 모양이다. Tom 일가가 슬슬 피곤할 것 같아서 작별을 고하고 귀가길에 나섰다. 그런데 때마침 설 연휴의 시작이라 하행길이 지독한 정체에 거렸다. 약 60여 킬로미터의 거리이고, 길의 대부분이 고속도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집에서 의정부로 갈 때는 1시간 정도 밖에 안 걸렸는데, 귀가길에는 무려 3시간이 넘게 소요되었다.

역시 전날과 마찬가지로 귀가와 함께 우리 둘 모두 뻗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