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즐겨했던 C&C는, 시대를 풍미한 PC게임들 가운데 단연 첫 손으로 꼽는 수작이다. 지금이야 C&C라고 하면 GMT의 Command & Colors라는 보드게임을 떠올리지만, 당시만 해도 C&C는 누구에게 물어도 Command & Conquer라고 답할 정도로 대표성을 지닌 게임이었다. 이후 워크래프트를 거쳐 스타크래프트라는 희대의 걸작을 낳는 RTS(Real-time Strategy-실시간 전략 게임) 장르의 기반을 닦은 게임이기도 하다.

이 장르의 게임들은 일정한 정도의 테크트리를 타는 것이 묘미이다. 제한된 시간과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는 무분별하게 유닛과 기술향상을 시켜서는 안된다. 자신이 주력할 부분을 한정하고, 그 부분의 테크를 하나하나 밟아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테크트리 유형의 게임으로는 시드 마이어의 문명을 빼놓을 수 없다. 기술 개발 시, 고급 기술들은 하위 기술들이 충족되어야만 개발할 수 있게 되어있는 전형적인 테크트리 게임이다. 아예 게임을 구매하면, 테크트리 요약도를 제공하기도 한다.

이러한 테크트리가 PC게임에서만 존재할까? 그럴리 없다. 대표적인 테크트리 보드게임으로는, 시드마이어의 문명의 모델이 되었다고 하는, 프랜시스 트레샴의 문명이 존재한다. 워크래프트와 스타크래프트 역시 PC게임을 보드게임으로 이식한 바 있으므로, 해당 게임에서도 테크트리를 타는 재미가 존재한다.

지금은 구할 수 없는 게임이지만, ASSA Games가 2005년에 출시한 Conquest of the Fallen Lands 역시 매우 유쾌한 테크트리 게임이다.

위에서 언급한 게임들은 테크트리 게임이라는 점 말고도 또 다른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땅따먹기라는 지형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이들 게임에서 테크트리를 타는 이유는,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하여 더 큰 권력(혹은 승점)을 얻는 것과 관계가 있다. 이렇게 지형적 정보를 제공하는 게임들은 PC게임이건, 보드게임이건 시간을 많이 차지한다는 특징을 지닌다. 특히 보드게임의 경우 넓은 탁자에 게임판을 펼쳐야 한다는 문제 아닌 문제점까지 가지고 있다.

이들 게임에서 영토경쟁의 요소를 빼서 시간과 공간을 다이어트하고, 테크트리의 재미만을 추구한 게임은 없을까?

있다.

바로 스플랜더 Splendor (2014)가 그러한 게임이다.

스플랜더는 기본적으로 카드게임이다. 물론 카드를 어느정도 펼쳐놔야 하기 때문에 일정한 공간을 사용하지만, 앞서 언급한 게임들에 비해, 시간과 공간을 상당히 절약할 수 있다. 구성물이라고 해봐야 카드와 칩이 전부이므로, 휴대성 역시 발군이다.

(초기 세팅 사진 1)

게임의 초기 세팅은 사진과 같다. 카드를 단계별로 분류하여 4장씩을 공개해놓는다. 이들 카드 측면에는 획득에 필요한 보석 개수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상단에는 이들 카드가 가져다주는 효과가 표시되어 있다. 1단계의 카드는 주로 보석만을 제공해주며, 2단계에서는 승점도 제공해주는데, 3단계에서는 더 큰 승점을 제공해준다. 마지막 5인의 인물카드는 아예 승점만 제공해주는 존재들이다.


(초기 세팅 사진 2) - 찬조출연 X자X왕님의 손


게임 내 보석은 총 다섯 종류. 달그락 소리가 경쾌한 양질의 칩이 이들 보석을 나타낸다. (다른 하나는 와일드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보석이다.) 칩으로 제공되는 보석은 일회용이라, 카드 구입시 소비하면 반납하게 된다. 그러나, 카드로 제공되는 보석은 소비되어 사라지지 않는 영구적 재산이므로, 게임 중반 이후에는 칩보다는 주로 카드의 힘으로 다른 카드를 구매하게 된다.

이것이 게임의 핵심 포인트이다. 내가 이전에 어떤 카드를 구매했느냐에 따라, 이후에 구매할 수 있는 카드의 종류가 제한이 되기 때문에 테크트리 성격을 지닌 조합 모으기(Set Collection) 게임이 되는 것이다.

게임 내에서 자신의 차례에 할 수 있는 행동은 1. 칩 가져오기 2. 카드 선점하기, 3. 카드 구매하기 등이 있다.

칩을 가져오는 것은 카드를 구매하기 위함이니까, 이들 행동은 어려울 것이 없다. 그런데 카드 선점하기는 이 게임에서 중요한 상호작용을 야기한다.

게임 참가자들이 어떤 보석을 얼만큼 가지고 있는지의 정보는 모두 공개이다. 그러다보니, 특정 카드를 누가 노리고 있는지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내가 공들여 노리고 있는 카드를 앞에서 채간다면 그것만큼 허무한 일도 없다. 만약 내 조합의 완성이 상대방보다 한 두 턴 정도 늦을 것 같다면, 미리 카드를 선점하는 것도 중요한 행동이다. 다 차려진 상대방의 밥상을 눈 앞에서 송두리째 빼앗아옴으로써, 그의 얼굴이 총천연색으로 변해가는 모습 역시 이 게임이 주는 또 하나의 재미라 하겠다. 물론 참가자의 성향에 따라서는 육두문자와 주먹이 오갈 수도 있으나, 그건 당사자들이 알아서 합의할 일이다.

누군가가 15점을 획득을 하면 해당 라운드를 마치고 게임을 끝낸다. 다득점자가 승자인 것은 불문가지.

스플랜더는, 숙련된 사람들이 할 경우 30분 내외의 짧은 시간과, 적절한 휴대성을 지닌 매우 효율적인 게임이다. 규칙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양질의 칩까지 포함한 가격이, 다이브다이스 선주문 가격으로 4만원을 넘지 않는다는 것 역시 매우 다이어트에 성공한 작품이라 하겠다.

하지만, 재미는 다이어트 하지 않았다. 짧은 시간동안 테크트리를 타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 수 있다. 영토경쟁이라는 부분이 빠져서, 게임 참가자들의 상호작용이 부족할 것 같다면, 그것 역시 기우라고 말하고 싶다. 카드 선점을 통한 상호작용 역시 연약한 유리멘탈의 소유자들에게는 가볍지 않은 스크래치를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선주문 가격이 4월 1일부터 상승한다고 하니, 더 늦기 전에 달려가서 주문들 하시라. 클릭! 여건이 되는 사람들은 몇 카피 더 사서, 아직 보드게임의 맛을 느끼지 못한 사람들을 중독시키기 위한 아이템으로 사용하는 것도 추천하는 바이다.

끝으로, 먼 거리까지 달려와서 멋진 게임을 소개시켜준 사X마X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는 또한 게임 참가자 모두 스플랜더의 재미에 푸욱 빠져서 “한 판 더!”를 외쳤음에도 불구하고 매정하게 게임을 싸들고 돌아가버린 시크한 남자가 아니겠는가! (진정한 의미의 세일즈맨이기도 하다.)